05/28/23 욥 35~37장 “엘리후의 발언2” > 묵상편지

본문 바로가기

묵상편지

05/28/23 욥 35~37장 “엘리후의 발언2” Publish on May 31,2023 | 관리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59회 작성일 23-05-31 07:40

본문

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엘리후의 네 번의 발언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발언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오늘로 친구들의 대화가 모두 끝이 납니다.


I. 35장 (엘리후의 세 번째 발언)

엘리후는 욥에게 “아직도 자신이 합당하다고(옳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욥의 부름에 대답지 않은 것은, 하나님은 악인의 공허한 호소에 대답지 않으시기 때문이라 합니다. 

엘리후에 의하면, 지금까지 욥은 헛되이 입을 열어 지식 없는 말을 한 것입니다(35:16).


II. 36~37장 (엘리후의 네 번째 발언)

엘리후는 자신만만합니다.

(욥 36:2) 나를 잠간 용납하라. 내가 네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자기 말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는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헐...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뭘까요?)

(욥 36:3)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취하고,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이 말은 자기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증명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의인이 고난 받는 것은 악한 행위를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고, 그 길에서 돌이키시려는 것이라 합니다(36:8-10).

만약 불순종하면 자식 없이 죽는다고 합니다(36:12).

(이제 엘리후도 자식의 죽음으로 욥을 아프게 합니다. 나쁜 건 참 빨리 배웁니다. ㅠㅠ)


엘리후는 지금 욥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은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통로이니, 고통 받을 때 귀를 열고 경고를 들어야 한다. 그러면 행복을 주신다(36:15-17).”라고 합니다.


그러니, 욥이 할 일은 하나님이 불의를 행했다고 말할 게 아니라(욥이 의로운데 벌 받는다고 말한 것을 하나님이 불의를 행했다고 비틀어 해석한 것),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고 합니다(36:23-24).

하나님은 높으셔서, 우리가 그분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36:26).


엘리후는 자기 말에는 오류가 없고, 자기는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욥에게 그만 교만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땐 욥기에서 엘리후가 가장 교만합니다.)

    

인간은 우렛소리에 대해 깨닫지도 못하고, 태양도 바로 보지 못하는데, 어찌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겠냐고 합니다(36:29, 37:21).

그래서 (욥이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인간은 전능자를 찾을 수 없다 합니다(37:23).

(욥이 자기는 의로운데 고난 겪는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불의를 행하신 게 아니라고 합니다(37:23).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 착각하는 자를 무시하시니,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결론 내립 니다. 


엘리후의 말을 한 문장씩만 본다면 옳은 말이 많습니다.

또 맞는 말 대잔치입니다.

그런데 다 듣고 나면 동의할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것은 다른 친구들의 충고와 비슷한 현상입니다.)


엘리후의 발언 중에 몇 가지 약점이 눈에 띕니다.

1) 엘리후는 하나님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하나님이 욥에게 고통 주는 건 복종과 겸손을 가르치는 방편이라고 주장합 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데, 자기는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요?

엘리후의 말은 엘리후의 말로 반박됩니다.

“엘리후야, 너는 어떻게 안다는 말이니, 너는 인간이 아닌 거니?”


2) 엘리후의 결론은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해야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자를 무시하신다(욥 37:24).”입니다.

엘리후는 연설을 시작하면서 욥에게 지혜를 가르쳐주겠다고 했고, 자기 말에는 거짓이 없고, 자기는 완전한 지혜를 가졌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욥에게는 “하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자를 무시한다”고 합니다.

(“엘리후야, 그게 바로 너야!” 란 말이 절로 나오는 대목입니다.)


어떤 면에서, 어린 나이인데도, 그의 논리는 세 친구의 논리보다 더 고급스럽습니다.

연설도 상당히 웅변적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는 볼 줄 모르면서, 남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데에 그것을 사용합니다. 

또한, 내로남불입니다.

그래서 자기 논리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산상수훈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책망하시던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 같습니다(마 7:3).


3) 엘리후가 사용하는 논리나 용어가 매우 종교적입니다.

36장 하반부터 37장에 걸쳐 자연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마치 38장 이후에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말씀하시는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허울을 썼을 때, 정죄는 더 치명적입니다. 

저도 함부로 입바른 소리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내가 아는 그 정도를 상대방도 모르는 게 아닐 텐데 말입니다.

아는 체, 지적질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슴으로 품어주는 일”임을 다시 배웁니다.


4) 하나님은 멀리 초월해 계신 것만은 아닙니다. 

엘리후는 창조세계를 통해 욥을 설득합니다.

“눈, 비, 바람 같은 것들을 봐라. 얼마나 신기하니?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자연의 질서를 봐라. 얼마나 대단하니?

창조물도 이렇게 대단한데, 창조주는 얼마나 대단하겠니?

그런 하나님이 잘못했을 리 있겠니, 없겠니?

무조건 꿇어라.”라고 합니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하나님을 초월자로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알아가려는 시도를 좌절시킵니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저 멀리 무지개를 잡는 시도처럼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전히 욥을 바라보고 계시고, 욥 곁에 임재해 계시고, 꾸준히 자신을 알려주고 계신 분입니다. 


5) 엘리후는 창조세계의 경이로움을 설명하면서, 결국 인과법칙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창조세계는 인과관계로 운행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의 은혜로,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시려는 사랑으로 운행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옳고 그름, 의와 죄로 딱딱 이분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초등학교 산수가 아니거든요.

그보다 더 깊고 풍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뜻(의)을 옳고 그름으로 구분하는 율법적인 수단으로 제한합니다.

물론, 단순하게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해하지 못해도 무조건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문제 중엔 단순한 정답으로 설명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한두개 씩은 품고 있습니다.

복잡한 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그보다 더 복잡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힘들더라도 그분의 깊은 뜻을 헤아려보고, 그분의 뜻을 품어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크신 하나님을 알아가고, 체험해 나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하나님, 

아무 조건이나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뿐 아니라 열방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닮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 걸음도 따라갈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NqQmU96wq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