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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3/3/24 삼일 만세 운동 Publish on March 05,202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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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1회 작성일 24-03-05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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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교회는 한국이나 미국 공휴일에 대해 특별한 행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정신을 잇는 것은 중요합니다. 올해는 삼일운동 10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번에 기미 독립선언서를 다시 읽었는데, 끝부분의 흥미로운 표현이 저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녀노소 없이 음울한 고소로서 활발히 기래하야, 만휘군상으로 더부러 흔쾌한 부활을 성수하게 되도다(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에서 활발하게 뛰쳐 나와, 세상 모두와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게 되었다.)” 

  독립선언서에 기독교의 핵심 단어인 “부활”이 언급된 것은, 삼일운동이 기독교와도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민족 대표로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던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중 11명이 목사, 1명이 전도사, 2명이 장로, 3명은 평신도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그 희생도 컸습니다. 총독부가 1919년에 만든 자료에 의하면, 투옥자들 중 1290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그중 교역자가 150명 이상 이었습니다. 일부 피해본 교회가 42개, 반파된 교회가 24개, 완파된 교회가 17개였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암리 교회(경기도 화성)도 그때에 불탔고, 교인들도 몰살당했습니다. 당시에 한국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1.5%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겨우 20여만 명의 숫자가 1700만 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것입니다. 

  삼일운동의 배경과 원인으로 “부흥 운동”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원산 부흥운동 (1903년)과 평양 대부흥운동(1907년), 백만인 구령운동(1909년)으로 이어진 일련의 부흥 운동을 통해 복음이 빠르게 확산되었고,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에 뜨거움이 생겼습니다. 특히, 평양 대부흥운동은 길선주 목사의 회개로 시작되었는데요. 길선주 목사 는 부흥 운동을 이끄는 중심역할을 했고, 몇 년 후에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중 1인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재판을 받을 때에도 “국민이 된 이상은 독립하고 싶지 않은 국민이 어디 있소”라고 말했습니다(옥성득, 길선주 목사와 3.1운동).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삼일운동에 젊은 층이 많이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만세 운동으로 구속된 자의 절반이상이 30세 미만의 청년층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학교 선교를 통해 어린이와 청소년 전도에 힘을 썼고, 배재, 이화, 숭실 등 수많은 기독교 학교들이 전국에 세워졌습니다. 그러한 선교의 열매로 전도된 젊은이들이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도 이화학당의 학생이었습니다. 고향에선 집 옆에 세워진 매화교회에 다녔고, 서울로 유학 와서는 정동교회에 출석하던 기독교인 학생이었 습니다. 

  최근에 기독교 인구 구조가 역삼각 모양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노인층 교인 숫자는 변동이 없지만, 젊은 층으로 내려갈수록 급속히 줄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삼일절을 지내면서, 우리 교회에도 영적 부흥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갈급함이 불일 듯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우리 마음이 뜨거워질 때, 하나님이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삼일운동 역사를 통해, 우리가 교육 부서를 부흥시키고, 다음 세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배움이 우리들 가슴에 울려 퍼지길 소망해 봅니다. 이번 3월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길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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