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8/23 사 52-54장, “53장 네 번째 종의 노래” > 묵상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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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7/28/23 사 52-54장, “53장 네 번째 종의 노래” Publish on July 28,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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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56회 작성일 23-07-2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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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네 번째 종의 노래인 이사야 53장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네 번째 종의 노래는 종의 노래들 중에 가장 길고, 가장 유명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종이 겪어야 할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I.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가 나타났는데, 정작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야에 대한 확고한 믿음,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야가 외적으로 주목할 만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위대한 전쟁 영웅이거나, 엄청난 부자이거나, 사람을 쫙 빨아 당기는 카리스마적인 리더일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에게 드러난 메시야의 모습은 너무나 힘없고 연약해 보였습니다. 

마른땅에서 나온 가냘프고, 볼품없는 싹같이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초라한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는 코 찔찔 흘릴 때부터 우리가 봐오던 나사렛 동네 청년이 아니냐?” 고 평가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든 외적인 모습과 조건을 중요시 했습니다. 

자기가 세운 틀에 갇혀서 진짜 메시아를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편견과 집착 때문에 그 눈이 가려져서, 진짜 메시야가 나타나도 그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메시야에 대한 저의 시각과 생각은 어떤지 돌아봅니다.

혹시 제 속엔 어떤 편견이나, 고집이나, 나만의 확신같은 것은 없는지...

예수님이 내 방식대로 움직여 주셔야 기쁘고, 신앙생활에도 힘을 얻는 것은 아닌지...

반대로 그런 기대가 엇나가면, 믿음이 떨어지진 않는지...  

내 생각의 틀을 깨고 말씀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II.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3절은 메시야가 이 땅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고,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1. “멸시를 받아서” 

“발로 짓밟혔다”는 말입니다.

무시당하고, 천대받고, 왕따 당하고, 갑질 당했다는 말입니다. 


2.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버림받았단 말입니다. 배신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사람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고통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랬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배고픈 무리를 먹이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주님을 버렸습니다.

●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 외치던 그 입술로, 주님을 못 받으라고 소리쳤습니다.

● 종려나무 가지를 깔고 손 흔들던 그 손으로, 주님을 때리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 3년이나 키웠던 제자들도,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3.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간고는 “고통들과 슬픔들”이란 뜻입니다. 

질고는 “질병과 아픔”이란 뜻입니다.

메시야는 이 땅에서 우리가 겪는 수많은 고통들과 슬픔들과 아픔들을 겪으셨습니다. 

1) 주님은 이 땅에서 어렵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한 산골 목수의 아들로서 배고픔이 뭔지, 집안에 돈이 없는 게 뭔지 경험하면서 자랐습니다.  

2) 어른이 되어서도 “나사렛 촌놈이 뭘 안다고...” 하는 빈정거림과 무시를 경험했습니다. 

3) 귀신을 고치면 귀신들렸다고 몰아붙였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생기니까 역적도당으로 취급했습니다.

4)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 주님은 우셨고, 곧 멸망할 예루살렘의 장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이렇게 괴로움을 겪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시는 것입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셨기 때문에, 우리 아픔을 아시고, 우리 입장을 이해해 주십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은 주님을 “상처받은 치유자”라고 부릅니다.  

가스펠송 가사 중에 이렇게 있습니다. 

“주는 내 마음을 고치시고, 볼 수 없는 상처 만지시네.

나를 아시고 나를 이해하시네. 내 영혼을 새롭게 세우시네”


4. 마지막 표현은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구절에서 제일 찔립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히 12:2).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롬 1:26). 

그런데 저는 그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제 인생에서 십자가가 과연 몇 번째로 귀하고, 자랑스럽고, 중요한지 돌아봅니다. 

말로는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십자가를 이용하는 게 아닌가 찔림을 받습니다. 

나의 많은 자아들, 내가 귀중히 여기는 것들이 가득한 내 속에 과연 주님이 들어오실 자리조차 있을지… 


주님, 

주님은 저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셨는데,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작은 것을 발견합니다. 

제겐 아직 귀하고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 생각도, 감정도, 인생의 계획도, 돈도, 자녀도 너무 소중해서,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주님이 머무실 자리조차 없는 게 아닌지….

너무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다 비워내고, 주님을 가장 귀한 자리, 왕좌에 모시게 해 주시옵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9YC9CCrNX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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