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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7/07/23 잠 27~31장, 30-31장 “아굴과 르무엘” Publish on July 10,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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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976회 작성일 23-07-1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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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잠언 마지막 부분입니다.

30장과 31장은 부록같이 붙어 있는 장입니다.


잠언이 지혜문학이기 때문에, 조금만 파고들면 깊이 있는 해석을 발견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부록의 저자들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설명이 좀 어려울 수도 있는데요. 어려운 부분에서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마지막 부분만 읽으셔도 됩니다.)


잠언에는 저자에 대한 표제(Superscription)가 붙어 있어서, 저자를 찾기가 쉽습니다.

1) 1:1, 10:1, 25:1에는 “솔로몬의 잠언”이라 나오기 때문에, 잠언을 솔로몬이 지었다고 봅니다.

2) 22:17과 24:23에는 “지혜 있는 자의 말”이라 나옵니다. 단어가 다르긴 하지만, “지혜 있는 자”가 솔로몬이라 보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3) 25:1에는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것”이라고 나옵니다. 구전되어 내려오던 솔로몬의 잠언들(BC 10세기)을 히스기야 시대(BC 8세기)에 추가한 것 같습니다.

4) 그런데, 부록의 저자인 “아굴”과 “르무엘”에 대한 해석은 주장이 엇갈립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부분을 차근차근 해설하면서 묵상하겠습니다.


I. 잠언 30장

“(잠 30:1, 개역한글) 이 말씀은 야게의 아들 아굴의 잠언이니,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


개역 한글 번역은 1절을 짧게 번역하고 지나가는데요. 

표준새번역 은 1절을 다르게 번역할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잠 30:1, 새번역) [아굴의 잠언] a이것은 야게의 아들 아굴이 말한 잠언이다. b이 사람이 이디엘에게 말하고, 또 이디엘과 우갈에게 말하였다.

(a 또는 '이것은 마싸 사람 야게의 아들 아론이 한 말이다'. 마싸를  '잠언', '경고'로 이해하지 않고 지명으로 이해한 것임. 

b 또는 "그가 말하였다. '하나님, 저는 피곤합니다. 하나님, 저는 피곤합니다. 제가 어떻게 다시 힘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히브리어 자음 본문을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번역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 


1. 아굴은 누구일까요?

1) 아굴을 솔로몬의 다른 이름(필명)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아굴의 뜻은 “collector(수집자)”입니다. 

아굴이 당시에 구전되던 여러 금언을 모아 편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굴은 이스라엘식의 이름이 아니고, 어느 지파 사람인지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실존 인물이 아니라, 솔로몬의 필명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아굴”을 제3의 인물로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원래 1:1에서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할 때, 잠언은 [마살]이란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아굴의 잠언” 할 때, “잠언”은 [마싸]라는 다른 단어를 썼습니다. 

마싸는 원래 “운반한다”는 동사에서 생겨난 명사인데, “짐을 운반,” “생각을 운반(발언, 노래),” “신의 말을 운반(예언)”등의 뜻으로 두루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 “발언,” 즉 “잠언”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마싸]를 지명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마싸가 지명이라면, 아라비아반도의 사막 지역에 있는 지명입니다. 

또한 아굴도 유대식 이름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이름 자체가 이방인의 이름입니다.

만약에 마싸를 지명으로 보면, [아라비아 지역 마싸 출신의 아굴이라는 이방인]이 되는 거죠.

만약 잠언 30장의 저자인 아굴이 이방인이라면, 하나님의 선교 관점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난외주를 첨가하여, 두 가지 번역을 다 소개한 것입니다.

● 이것은 야게의 아들 아굴이 말한 잠언이다. (마싸를 잠언으로 해석한 경우)

● 이것은 마싸 사람 야게의 아들 아굴이 한 말이다. (마싸를 지명으로 해석한 경우)

   

2. 이디엘과 우갈

이디엘과 우갈도 해석이 엇갈립니다.


1) 인명

전통적으로 많은 성경이 이디엘과 우갈을 인명(고유명사)으로 번역합니다.

원래 원문엔 이디엘이 두 번 나오는데요.

예전의 개역 한글에선 한번을 생략하여, [그가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니라]로 번역 했습니다.

하지만, 개역개정에선 두 번을 살려서, [그가 이디엘, 곧 이디엘과 우갈에게 이른 것이 니라]로 번역했습니다.


2) 다양한 해석

그러나 요즘 나오는 성경들은 이디엘과 우갈을 일반 명사로 번역합니다.

단어의 뜻을 살리게 되면, 더 다양한 번역이 가능합니다. 

● ESV 성경은 “I am weary, O God, and worn out. (저는 지쳤습니다. 오 하나님. [완전히 지쳤습니다].)”이라고 번역했고요.

● NRSV는 “I am weary, O God. How can I prevail? (저는 피곤합니다. 오 하나님. [제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이라고 번역했고요.

● 새번역성경에선 “하나님, 저는 피곤합니다. [제가 어떻게 다시 힘을 되찾을 수 있습 니까?]” 로 번역했습니다.

이런 번역들은 뜻을 강조하겠다는 의도는 좋습니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양해진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뜻을 강조하는데, 정작 그 뜻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거죠.


3) 인명과 의미

그러나 저는 이디엘과 우갈이 word play라고 봅니다.

히브리어에는 word play가 자주 사용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인명으로 사용했지만, 의미(뜻)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디엘은 [이티(with)+엘(God)=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임마누엘과 비슷한 의미)]이란 뜻이고요.

● 우갈은 [야콜(I am able to, 할 수 있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명사로 고치면 [전능자] 란 뜻입니다.

이디엘과 우갈을 붙여서 읽으면 이렇게 됩니다.(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 하나님에게 포커스를 맞추어 해석하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전능자 하나님에 대해 말한 것이다]란 뜻이 됩니다.

● 우리에게 포커스를 맞추어 해석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동안 잠언에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준행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신다”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고 사명을 추구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셔서, 내가 그것을 능히 성취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고백을 생각나게 합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저도 이렇게 고백하기 원합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말로는 많이 고백해 왔습니다.

그런데, 제 삶에 얼마나 적용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즉, 삶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제 앞에도 하나님이 말씀과 사명이 놓여 있고, 많은 삶의 문제들과 장애물들도 놓여 있습니다.

때로 장애물들은 여리고 성처럼 견고해 보이기도 하고, 산 위의 아낙 자손처럼 거대해 보이기도 합니다.

잠언 24장 말씀처럼 주변 악인들이 흥하는 것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가 죽고, 힘이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다시 믿음 위에 굳게 서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디엘과 우갈의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전능의 하나님,

내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내 하나님은 나와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전능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이 해 주시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미련하고 연약한 저 자신을 의지치 말게 하소서.

오늘 이디엘과 우갈의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전능이 저를 위해 행하시는 일들을 체험하며 살게 하소서.”

 

II. 잠언 31장

1. 르무엘은 누구일까요?

“(잠 31:1) 르무엘왕의 말씀한바, 곧 그 어머니가 그를 훈계한 잠언이라.”


르무엘이 누구인가에 대해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솔로몬의 다른 이름이다. 혹은 필명이다는 견해입니다.

르무엘을 히브리어에서 직역하면 “하나님을 위한 자” 또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란 뜻입니다.

솔로몬은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헌신되었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였습니다(삼하 12:25).

이렇게 보면, 르무엘은 솔로몬이 됩니다.

밧세바가 솔로몬에게 교훈한 잠언이 됩니다.

그런데, 단점은 르무엘이란 이름이 한 번도 왕의 이름으로 사용된 예가 없다는 것입니다.


2) 이상적인 왕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이름이란 견해입니다.

역사상의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인 왕을 르무엘이란 가상의 인물로 표현했다는 견해입니다.

이 역시, 실례가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3) 마싸 지방의 왕이란 견해입니다.

31장 1절은 두 가지 번역이 가능합니다.

1) 르무엘 왕이 말한 잠언

2) 마싸의 왕 르무엘의 잠언


앞에서 설명했듯이, [마싸]을 발언도 되고, 지명도 됩니다.

만약에 대부분의 성경처럼 31장의 [마싸]를 발언으로 해석하면, 말씀(개역)이나 잠언(새번역), sayings(NIV, NLT), words(ESV, KJV)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명으로 해석하면, 아굴이 마싸 지방 출신이듯이, 르무엘도 마싸 지방의 이방인이 됩니다.

공동번역은 “마싸 왕 르무엘”이라고, CEV도 “King Lemuel of Massa”라고 번역하고 있습 니다.


2. 아굴이나 르무엘이 누구인지가 왜 중요할까요?

(오늘은 좀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앞의 설명이 어려우신 분은 이 부분만 읽으셔도 되겠습니다.)

 

30장과 31장의 저자가 누구냐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일수도 있고,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은 “잠언의 의미나, 해석의 범위를 폭넓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열방을 품고 계신 하나님이고, 구약시대에도 (일부이긴 하지만)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을 늘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이 이방인을 품고 계셨고, 이방인들을 선교했고, 그들이 성경을 기록하는 역할도 했다면, 오늘날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이 성령의 유기적 영감으로 기록한 것이라면, 구약시대에도 성령이 이방인에게 임하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선교에 더욱 힘을 써야 하겠다는 거룩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해외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들과 더 가깝게 연결하고, 필라 지역에서 사역하는 국내 선교사들도 더욱 관계를 두텁게 만들어 가야겠다는 도전을 받게 됩니다.

선교는 교회가 하는 활동 중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열방이 주님을 알게 하고, 주님을 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WJ8u4hdJ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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