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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7/10/23 아 1~4장, “아 2장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Publish on July 10,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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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65회 작성일 23-07-1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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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아가서를 묵상합니다.


아가서를 이틀 동안만 묵상하는 것이 너무 아깝습니다.

주옥같은 말씀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아가서를 읽으면, 듀언 게렛(Duane A. Garrett) 교수님의 설명이 생각나곤 합니다.

예전에 고든콘웰에서 석사 공부할 때 게렛 교수님에게 아가서를 배웠는데요.

그 학기에 교수님이 WBC 주석 “아가서”를 막 출판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따끈따끈한 책을 읽으며 공부했었습니다. 


아가서는 오페라 같은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남자 가수와 여자 가수, 그리고 배경에서 합창대가 노래하는 구조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 동네 사람들이 출연하는 오페라인 거죠.

원래 고대 이집트에서 두 사람이 무대에 나와 노래하는 초기 형태의 공연물이 있었습니다.

마치 듀엣이 무대에서 노래하는 아주 작고 소박한 형태지요.

그런데 솔로몬은 합창이 등장하는 새롭고, 웅장한 규모의 공연물을 고안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서를 읽을 때, 그 구절의 화자가 누구인지 구분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동네 사람인지 구분해서 읽으면, 더 잘 이해됩니다. 

요즘 성경에는 화자를 구분하는 설명이나 소제목이 붙은 경우가 많으니, 참고하시면 유용 하실 것입니다.


아가서는 여러 가지 관점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 일차적으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 이야기인데요.  

-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그 신부인 이스라엘의 사랑 이야기로 적용하며 읽었습니다.  

- 또한, 초대 교회 성도들은 신랑 되신 예수님과 신부인 교회의 사랑 이야기로 적용하며 읽었습니다. 

- 요즘 우리는, 아가서를 예수님과 나의 사랑이야기로 적용해서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묵상할 본문은 아가서 2장입니다.

“(아 2:13)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1. 관점과 시각이 중요합니다.

아가서는 어제까지 읽은 전도서와 관점이 아주 다릅니다.

- 만약 전도서에서 방금 읽은 구절을 말한다면, [무화과나무가 아무리 푸른 열매를 맺고, 포도나무가 아무리 꽃을 피우고 향기를 토해도, 너와 나는 세월 따라 시들어버릴 피조물 들이다]가 될 것입니다.

- 하지만, 아가서에선, “무화과 열매와 포도 꽃이 우리 사랑을 축복해 주기 위해 둘러싸고 있구나.”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관점이 차이를 만듭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게 달라집니다.


2.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옛날의 제 모습이 생각납니다.

저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nothing의 인생, 병풍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저에게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환아” 하시며 제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해 주셨습니다.

“내가 다 보았다.” 해 주셨습니다.

저를 꼬옥 안아 주셨고, 제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 후, 대학 다니던 어느 날 아가서를 읽었습니다.

“나의 사랑 인환아, 일어나렴. 나와 함께 가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님 손잡고 가고 있습니다.

가끔 그 길이 힘겨울 때도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저를 잡아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는 사랑 덕분에, 오늘도 그 손을 붙잡 고 있습니다. 


3. 아가서엔 “함께”라는 단어가 6번 나옵니다.

“함께”라는 단어는 그 뜻이 두 사람 이상이 모여야 가능합니다. 

2장 10절에서 “함께 가자”라고 한 표현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이 함께하길 소망하는 장면마다 “함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함께”라는 단어는 주로 청유형으로 표현됩니다. 

(함께 가자. 함께 하고, 함께 유숙하자.) 

또한, 의지를 표현할 때도 사용됩니다.

(함께 찾으리라.)


“함께 가자”라는 초청을 계속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도 저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상상합니다.

“인환아, 일어나렴. 나와 함께 가자.” 하시며 초청하시는 음성을…….

그렇게 초청하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오셨음을,

그렇게 초청하기 위해 목숨 바쳐 사랑해 주셨음을,

그 초청을 위해 핏값을 치르셨음을 다시 생각합니다.


3.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합니다.

둘이 모이는 순간 공동체가 됩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성화 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연인이 만나면 싸우는 것 같습니다.

상류의 돌들은 뾰족합니다. 

그러나 하류로 내려가면 돌들이 둥글둥글해집니다.

서로 부딪히면서 모난 부분이 깎이고, 둥글어져 가는 것이지요.


예전에 한국에서 “인간론” 수업 들을 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선해지기 쉽고, 쉽게 성자처럼 보일 수 있다고 합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뾰족한 성품이 드러날 일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은 더러운 오물이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하수돗물 같은 상태라고 합니다.

실은, 둘이 서로 지지고 볶으면서 밑바닥이 드러나기도 하고, 흙탕물이 생기기도 하면서 변화되어야 진짜 변화가 일어난다고, 그래서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하셨던 설명이 생각 납니다.


가정도 공동체이고, 교회도 공동체이고, 통독 그룹도 공동체입니다.

모임을 통해 공동체를 이루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가끔은 힘듭니다.

그래도 “함께”여서 좋습니다.

그리고 계속 “함께”이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EDqxbt0f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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