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7/23 시 135-138편, “137편 바벨론 강변의 노래” Publish on June 28,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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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시 137편을 묵상하겠습니다.
137편은 독특한 시입니다.
150편의 시들 가운데 비슷한 시가 하나도 없습니다.
형식으로 보면, 애가이기도 하고, 찬송이기도 하고, 저주시이기도 합니다.
내용으로 보면, 눈물의 시편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이 타향에서 성전을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설움의 노래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을 때입니다.
바벨론 포로라 할 때, 주의할 점이 있는데요.
노예가 아니라, 포로였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으니, 노예로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교적 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법 테두리 안에 있으면, 편안히 살 수 있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에서 보다 더 잘 살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의 변방에 있는 시골나라였지만, 바벨론은 당시 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에 이미 상수도도 있었고, 포장된 도로도 있었고, 3층 건물도 존재했습니다.
환경만 본다면, 이스라엘보다 훨씬 살기 좋았습니다.
또한, 똑똑한 사람들은 관직에 나가서 출세할 수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다니엘입니다. 총리가 되었습니다.
에스더도 마찬가지입니다. 왕비가 되었습니다.
포로로 잡혀왔지만,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스라엘에서 보다 더 잘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에겐 물질과 환경적인 풍요가 채워줄 수 없는 갈급함이 있었고, 그 영적인 갈급함 때문에 탄식했습니다.
즉, 삶이 고달파서 운 것이 아니라, 시온을 기억하면서 그리워서 운 것입니다.
이들의 노래는 우리들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대문입니다.
우리는 이민으로, 혹은 유학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미국이 선진국이긴 하지만, 타향에서 사는 게 쉽지만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특히, 신앙적으로 살려고 하면, 미국도 살기 쉬운 나라는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불렀던 이 노래를 통해, 이민 생활하는 오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 묵상해 보겠습니다.
1. 영적인 민감성이 있어야 합니다.
(시 137: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울고 있습니다.
잘 살고 풍요로운 땅에서 왜 울고 있습니까?
배고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영적인 곤고함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예배드리고 싶어도 예배드릴 장소가 없습니다.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맘껏 신앙생활 할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게 된 것도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다가 그렇게 된 거잖아요?
그런 영적인 기갈 때문에 울고 있는 것입니다.
제 마음속에는 어떤 갈급함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제게는 영적인 갈급함이 있는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싶은 욕구와 간절함이 있는지?
오늘 주님 만나고 싶은 갈망으로 눈물 흘리는 심령이 되길 소망합니다.
은혜를 사모하며 부르짖는 심령이 되길 원합니다.
2. 유대인들은 강변에 나갔습니다.
여기에서 바벨론 강변은 바벨론의 유프라데스 강과 티그리스 강, 그리고, 그 주변을 흐르는 지류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강변에 모였을까요?
강변에 모였다는 것은 강변에서 기도하고 예배드렸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회당에 모이기 어려울 때엔 강변같이 한적한 곳에 모여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행 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바울이 빌립보에 선교하러 왔는데,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도하러 모일 곳을 찾아 갔습니다.
강가로 갔더니, 기도하던 루디아를 만났고, 빌립보 선교의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바벨론에 있던 유대인들이 한적한 강변에 모였다는 것은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데 힘썼다는 말입니다.
오늘 저도 함께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데에 집중해야겠습니다.
저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이 되려고 애써야겠습니다.
“주여,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게 도와주시고, 주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3. 신앙과 삶이 일치해야 합니다.
(시 137: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이방 사람들은 대놓고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라고 깔보았습니다.
성전에서 찬양하던 노래를 자기들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는 노래로 불러 보라고 했습니다.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이때, 유대인들이 바벨론 사람들에게 잘 보이면, 부자가 될 수도 있고, 출세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그 삶속에서 신앙을 팔아먹어야 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포로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1) 악기 연주를 포기했습니다.
(시 137: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차라리 악기 연주를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연주하느니, 차라리 내 오른손이 말라버리라고 했습니다(5절).
2) 노래 부르기도 포기 했습니다.
(시 137: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차라리 그런 노래 부르느니,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엄청난 손해를 각오하고, 신앙의 결단을 한 것입니다.
저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봅니다.
저는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주님을 위해 무엇을 결단하고 있는지…
주님,
저도 결단하는 신앙이 되기 원합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신앙을 가지기 원합니다.
교회에 나와서만 신앙생활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삶속에서 신앙을 드러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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