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8/23 대하 25~28장, “아하스 왕과 오뎃 선지자” > 묵상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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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4/28/23 대하 25~28장, “아하스 왕과 오뎃 선지자” Publish on April 28,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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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27회 작성일 23-04-28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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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대하 28장을 묵상하겠습니다.

남유다의 12대 왕인 아하스 시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하스는 대하 28장뿐 아니라, 왕하 16장과 사 7장에도 등장합니다.

나름 유명한 왕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악한 일로 유명합니다.


1. 아하스의 악행

그는 20세에 왕이 되어 16년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악한 왕으로 손꼽힙니다. 

남유다에서 므낫세, 아달랴 다음으로 악할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악했는지,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북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역대기는 그를 아예 “이스라엘 왕”이라 부릅니다.

“(대하 28:19) 이는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

남유다 왕을 이스라엘 왕이라 부르는 것은 비꼬고 경멸하는 것입니다.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남유다 왕이라 할 수 없고, 북이스라엘 왕이다.”라는 뉘앙스 입니다.


실제로 아하스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보다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대하 28:2)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바알 숭배를 허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바알 우상을 부어 만드는 일에도 앞장섰습니다.

이번 부분에서는 유일무이합니다.

그의 악행은 거의 아달랴 급입니다.


그 외에 다른 우상들도 닥치는 대로 섬겼습니다.

특히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했다고 나오는데요(3절). 

이것은 가나안과 암몬이 섬겼던 몰록 우상에게 자녀를 인신 제사로 바쳤다는 말입니다. 

끔찍합니다. 

아하스의 주된 관심사는 나라의 경제와 국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라만 잘 살수만 있다면, 북이스라엘처럼 바알을 숭배하는 것도, 암몬처럼 몰렉에게 인신 제사를 지내는 것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과 적대적 관계였습니다.

그는 국제 정세에 눈이 밝았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베가 왕)은 아람과 동맹을 맺고, 국제무대에서 강대국으로 떠오르던 앗수르에 대항했는데요.

남유다(아하스 왕)는 도리어 친 앗수르 정책을 폈습니다.

앗수르가 절대 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싫어했던 북이스라엘(베가)과 아람(르신) 연합군이 남유다를 침공했습니다.

북이스라엘로서는 다른 노선을 걷는 남유다부터 처단하려 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신앙적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에 대한 징계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은 연기 나는 부지깽이에 불과하다고,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사 7장).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실 징조(sign)를 구하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여호와를 시험치 않겠다”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상당히 신앙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제안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는 앗수르 왕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라는 징조를 주셨습니다(사 7:14). 

그리고 얼마지 않아 남유다는 두 왕의 침략을 받고, 짓밟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사 7:16).

또한, 그 뒤에 앗수르가 오면, 지금까지 당하지 못했던 엄청난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 하셨습니다(사 7:17).


진짜로 남유다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았습니다(대하 28:5-7). 

남유다는 대패했습니다.

아람은 많은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북이스라엘도 하루 만에 12만 명의 용사를 죽였습니다. 왕자와 궁내 대신, 총리대신까지도 죽였고, 20만 명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또한, 남유다는 에돔과 블레셋의 공격도 받습니다.

이것도 아하스가 범죄한 까닭이었지만, 그는 정신 차리지 않습니다.


이때, 앗수르가 자기를 도와주었을까요?

아니요.

앗수르가 자선단체가 아니잖아요.

그냥 도와줄 리 만무합니다.

오히려 남유다의 위기를 서진 정책의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이 오히려 아하스를 공격했습니다.

아하스는 성전과 왕궁의 보물만 허비했을 뿐,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했고, 오히려 괴롭힘만 당했습니다(대하 28:20-21).


그러자, 아하스는 기가 찬 생각을 합니다.

“아람의 신이 그 왕을 도와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했다. 그러니 나도 아람의 신에게 제물을 바쳐야겠다. 그러면 그 신이 나도 승리하도록 도와줄 것이다”(대하 28:23).

열왕기에 보면, 다메섹에 있는 우상 제단을 본떠서 성전 제단을 만들었습니다(왕하 16:10 -18). 

나중에는 성전기구들을 부수고, 성전 문을 닫고, 예루살렘 곳곳에 우상을 섬기는 제단을 쌓았고, 유다 성읍들에는 산당을 세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너무 멍청했고, 어리석었고, 고집이 세었습니다.

그가 우상 숭배에 대한 고집을 부리면 부릴수록 나라는 더 큰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2. 사마리아의 선지자 오뎃

아하스가 이렇게 악행을 저지를 때,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무명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마치 룻기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나오미의 가족들은 신앙적으로 타락해 있었는데, 이방 여인 룻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겉으로 볼 때, 아하스는 다윗의 후손이요, 영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남유다의 왕이었지만, 우상 숭배에 푹 빠져있었고, 전쟁에도 패배해서 정신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마리아에 하나님의 사람 오뎃이 있었습니다.

그는 엘리야처럼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는 무명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를 너무 심하게 살육하고, 동족 20만 명을 포로로 끌고 올 때, 용기 있게 나서서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습니다.

남유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패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북이스라엘도 이렇게 잔혹 하게 동족을 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범죄행위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포로들은 우리의 형제자매니, 풀어주고 돌아가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진노하실 것이 라고 했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승리에 들떠 있었고, 군인들은 완전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상당히 위험한 발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뎃은 용감하게 하나님의 뜻을 가감 없이 전했습니다.


이때, 에브라임 지파의 지도자들 4명이 이 말씀에 신실하게 반응했습니다.

요하난의 아들 아사랴와 무실레못의 아들 베레갸와 살룸의 아들 여히스기야와 하들래의 아들 아마사였습니다(대하 28:12).

이들도 유명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장면에만 등장하는 무명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돌아오는 군사들을 용감하게 가로막고, 포로들을 되돌려주라고 요구

했습니다.

이 역시 상당히 위험한 발언입니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그들을 칼로 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군인들도 포로들과 전리품을 이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4명의 지도자는 20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돌보는 임무를 떠맡았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20만 명의 포로들을 가족같이 보살펴주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던 이들에게 알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엄청나게 고마운 일일 것입니다.

당시 전쟁 포로는 대부분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제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유를 준다니요. 

노예해방의 감격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4명의 지도자는 포로들을 그냥 풀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으로 헐벗은 이들을 입히고 신겼습니다. 

목마르고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상처 입은 이들에겐 기름을 발라 치료해 주었습니다.

무조건적인 자비와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눅 10장).

이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어서 더욱 가깝게 느껴집니다.

(혹시 예수님이 하필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를 말씀이신 것이 이 장면과 연관이 있는 걸까요?)

 

이 지도자들은 전쟁에서 포로로 끌려온 자들에게 넘치는 자비와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그들을 악하게 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형제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전쟁포로를 풀어주는 차원을 넘어서, 형제를 보살피는 마음으로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남북으로 갈리고, 서로 피 터지게 싸웠다 하더라도, 한 형제인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하스와 무명의 성도들의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또한, 그들의 모습에 저의 모습도 비춰보게 됩니다.

저도 겉으로 보기엔 목사이고, 오래 신앙생활 했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 하고, 따르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또한, 저도 비판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쉽게 하지만, 도와주고 감싸주고 섬기는 일에는 인색함을 발견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이름도 다시 불러 봅니다.

선지자 오뎃, 에브라임 자손의 지도자인 아사랴와 베레갸, 히스기야, 아마사.

저도 이들의 신앙과 사랑과 섬김과 긍휼의 모습을 흉내 내려 애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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