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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4/15/23 대상 1~9장, “포로 귀환민 족보” Publish on April 15,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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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56회 작성일 23-04-15 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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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부터 역대상을 읽게 됩니다.


I. 역대기 개론

역대기는 사무엘과 열왕기와 마찬가지로, 원래 한 권이었는데, 분량상 상하로 나누어진 성경입니다.

역대기는 사무엘과 열왕기와 내용이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무엘/열왕기가 주된 역사책이고, 역대기는 보충역사책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무엘/열왕기는 여러 왕에 대해 골고루 기술하고 있는 반면에, 역대기는 다윗왕가에 집중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역대기가 가장 마지막에 추가되어 있습니다.

즉 사무엘/열왕기를 다 읽고 나서, 역대기의 역사를 추가로 읽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두 역사책은 내용이 겹치긴 하지만, 시각이 아주 다른데요.

기록된 배경과 저작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사무엘/열왕기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기록했습니다.

70년 포로 생활을 하면서, 남, 북이스라엘이 왜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는지를 역사를 통해 고백합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결과 나라가 망했고, 포로로 끌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들, 왕들, 대제사장들이라 할지라도 잘못한 일이 있으면 가감없이 다 기록 했습니다.


2) 반면에 역대기는 포로에서 귀환한 뒤에 기록했습니다.

저자가 에스라일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에스라/느헤미야와 문체가 비슷하고, 역대기 끝부분과 에스라 시작 부분의 내용이 겹칩니다.)

포로에서 귀환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포로에서 귀환하게 되었는지를 역사를 통해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기에는 북이스라엘 왕들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과 솔로몬과 그 후손들 (19명의 남유다 왕들) 이야기만 나오고, 그들의 좋은 점들이 두드러져 나옵니다.


그래서 두 역사책을 비교할 때, 전자는 심판의 책인 반면, 후자는 소망/회복의 책입니다.

전자는 선지자적인 관점으로 쓰였고, 후자는 제사장적인 관점으로 쓰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연약한 인간 왕들이 어떻게 실패했는가에 관한 책이고, 후자는 진짜 왕/강한 왕 하나님이 어떻게 승리하시는가에 관한 책입니다.

역대기는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상 1~9장: 족보

대상 10~29장: 다윗

대하 1~9장: 솔로몬

대하 10~36장: 남유다 왕들


II. 1차 포로귀환민 명단 

오늘은 대상 9장을 중심으로 묵상하겠습니다.

대상 1~9장은 족보 부분인데요.

성경에 족보가 여러 번 나오지만, 족보 목록이 가장 깁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의 수면제 부분이라고 하기도 하고, 발음 연습용 부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생소하고, 발음하기 힘든 이름들이 몇 장에 걸쳐 계속 나오기 때문입니다.


9장에는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백성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크게 3차례 포로로 잡혀갔고, 3차례 포로에서 귀환했습니다.

포로는 BC 605(다니엘과 세 친구들), BC 697(에스겔과 기술자들), BC586(시드기야와 백성들)이 잡혀갔고,

귀환은 BC 538(스룹바벨과 여호수아), BC 458(에스라), BC 444(느헤미야)가 이끌었 습니다.


이 중에서, 9중에는 1차 귀환민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이들은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포로에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1차 귀환민들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예수아)

입니다.

1차 포로로 잡혀가서 1차 귀환할 때까지 68년(70여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두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이들은 이미 바벨론에 정착했고, 생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돌아간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거의 1200km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고향 땅은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포로민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업을 버리고, 먼 길을 가야 하는데도, 끝내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귀환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귀환한 것은 유다가 범죄해서 포로로 잡혀 온 것이니, 다시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제대로 언약을 지키고, 제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대상 9:1) 온 이스라엘이 그 보계대로 계수되고,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정치적으로 본다면, 유다가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에 낀 약소국이어서 망했지요.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본다면, 유다의 불순종과 범죄 때문에 망했습니다.

그 범죄의 핵심은 우상을 섬기고, 이방에게 의지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더 이상 용납지 않으셨고, 성전을 떠나셨고, 성전이 파괴되었 습니다.

성전 기구들도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으로 다 옮겨졌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받은 충격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것도 슬프지만, 성전이 불탄 것은 더욱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포로기에 에스겔을 통해 새 성전에 대한 환상을 주셨습니다.

포로민들 중에 신실한 자들은 그 환상에 대한 성경을 읽으며 새로운 꿈과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기적같이 귀환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했습니다.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고, 다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이루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돌아간 사람들은 암유다 백성들(주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이 많았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많았습니다.

“(대상 9:2) 먼저 그 본성으로 돌아와서 그 기업에 거한 자는 이스라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과, 느디님 사람들이라.”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귀환민들 중에 선봉에 섰습니다. 

성전에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제사장들이 1760명이 귀환했습니다.

또한 레위인들 중에서도 문지기, 기구 맡은 자, 향품 맡은 자, 전병 굽는 자, 떡을 진설하는 자, 찬송하는 자들이 많이 귀환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하겠다는 목표를 가졌습니다.

성전을 다시 짓고, 예배를 회복하기 원했습니다.

예배가 무너지니, 성전이 무너졌고, 나라도 망했고,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귀환민들은 포로에서 귀환해서 성전을 회복하고, 제사(예배)도 회복하길 원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고전 6:19).

제 마음의 성전은 어떤 상태인지 돌아봅니다.

제 마음의 성전도 다시 회복하길 원합니다.

무너진 곳을 수축하고, 폐허가 된 곳에 새롭게 건축하기 원합니다.


저의 신앙의 회복도 마음의 성전을 회복하고, 예배가 회복할 때 가능해질 줄 믿습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삶이 회복됩니다.

예배적인 삶을 살고, 삶 속에서 예배할 때, 신앙이 회복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 맘속에 새로운 성전을 세워나가야겠습니다.


III. 느디님 사람들

포로 귀환민 명단에서 특히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느디님 사람들”입니다.

느디님은 포로귀환의 역사를 기록하는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에 17번이나 등장합니다.

느디님에서 “나단”은 give, place란 뜻이고, “님”은 명사의 복수형입니다.

그러니 “주어진 사람들, 바쳐진 사람들, 맡겨진 사람들”을 일컫는 고유명사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느디님 사람들이 이전에는 전혀 나오지 않다가, 포로 귀환민 명단부터 갑자기 등장합니다.

사실 이들은 성전에서 막일하는 일꾼들 혹은 성전 노예들입니다.

민 31:30에 보면, 전쟁 포로들의 일부를 레위인들에게 주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수 9:27에서도,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을 여호와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며 물 긷는 자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느니딤이 이런 성전 막일꾼들의 후손이나 성전 노예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고 있다가 포로로 잡혀갈 때 같이 잡혀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잡혀가서는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과거에는 노예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성전에서 막일할 필요가 없잖아요.

새로운 땅은 그들에게 기회의 땅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구한말에 나라가 망하면서 반상의 구분이 없어진 것과 비슷합니다.

그전에는 양반에게 부림 받는 종이었지만, 중국이나, 일본이나, 미국에 나가 산다면 더 종으로 살 필요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굳이 포로지에 사는 것을 거절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도 그들의 거주지는 예루살렘 성전 남쪽으로 제한되었습니다(느3:26).

이들의 지위는 탁월하게 상승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왜 돌아왔을까요? 성전에 대한 열심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망 외에는 이들의 귀환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바벨론 땅에 남아있었다면, 오히려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를 버리고 다시 고생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성전과 예루살렘의 회복과 재건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기억하셨습니다.

비록 탁월하게 신분이 상승하진 않았지만, 레위인과 같은 면세의 특권도 주어졌고, 레위인과 동일한 수준의 율법 준수도 요구받았습니다(스 7:24).

또한 제사장과 레위인과 나란히 귀환민 명단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느디님 사람들을 보면서, 저의 헌신과 열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처럼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을 선택하고, 삶 속에서 거룩한 열정을 품고 살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_iT1D-_G0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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