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0/23 삼하 17-20장 “내 아들 압살롬아” > 묵상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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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3/30/23 삼하 17-20장 “내 아들 압살롬아” Publish on March 30,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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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12회 작성일 23-03-30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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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독 식구 여러분,  

오늘은 삼하 18장을 묵상하겠습니다.

18장은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되는 장면입니다.


다윗은 일생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요. 

그 중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경험은 압살롬 사건일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기 아들이니까요. 

초기에는 압살롬과 반란군이 우세했지만, 다윗도 세력을 회복하였고, 둘이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 전쟁에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하셨습니다.

(삼하 18:8)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이것은 마치 여호수아가 아얄론에서 전쟁할 때,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사자가 더 많았던 것과 비슷한 현상입니다(수 10:11).

하나님이 도우신 것입니다.


전투의 결과를 알리기 위해 달려오는 군인에게 다윗이 먼저 물은 것은 승리의 결과가 아니라 아들 압살롬의 소식이었습니다. 

다윗은 "젊은 압살롬이 잘 있느냐?"하고 물었는데, 여기에서 '젊은'은 '소년(boy)'이라는 뜻으로도 쓸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지요.

객관적으로 본다면, 아버지를 미워하여 죽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아버지의 처들을 능욕하여 말할 수 없는 수치를 안겨준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음으로 반란군이 토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그는 모든 손길을 뿌리치며 문루로 올라가 실성한 사람처럼 울부짖었습니다.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1. 다윗의 눈물

다윗이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눈물에서 두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1) 죄책감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하나님이 다윗 자신을 징계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삼하 12:10)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삼하 12:11)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지금 그 심판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칼이 다윗의 집을 떠나지 않습니다.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처들이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결국 자기의 죄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죄책감이 다윗을 울게 했습니다.


2) 부모의 마음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녀들을 향해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칼을 들었을 때, 그의 소원은 자기 아버지의 목에 칼을 꽂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목 놓아 울었습니다. 

다윗이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며 울부짖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을 직면하면서, 자기 속에 있는 아들에 대한 사랑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상실감으로 울부짖는 모습은 세상을 다 잃은 자의 통곡처럼 보입니다.

사실 다윗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부모님의 마음이기도 할 것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죽더라도 자식을 살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마음

그런데 다윗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울음대로 압살롬을 살리고 싶었으면, 다윗이 왕위와 전쟁을 포기하면 간단히 해결될 이었습니다.

그러면, 압살롬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받은 왕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언약을 보존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왕으로서 반역을 심판해야 했고, 반란군과 싸울 토벌대를 내보내야 했습니다.

모순된 두 상황이 다윗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토벌대가 반란군을 진압했고, 반란자의 우두머리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반란의 진압은 아들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심판과 사랑이 양립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심판이 죽임을 가져왔기에 더욱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과 압살롬의 모순된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를 새로 보게 됩니다.

다윗은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아들을 징벌하고, 결국 죽게 해야 하는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이 상황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떤 마음이셨을 지를 보게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기뻐하셨고, 그를 아들처럼 사랑하셨고,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다윗이 어느 날 밧세바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치 않고, 왕권에 굴복하길 거부하고, 자신이 왕임을 주장하는 행위였고,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겠다고 주장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범죄를 처단하셔야 했습니다.


2. 마음을 모르는 자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윗의 마음을 알거나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슬픔을 이해하기보다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하여 있었습니다.

요압은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다윗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했고, 승리를 위해 그를 죽였습니다.

아히마아스는 승전보를 알리고 싶은 마음에 요압이 몇 번이나 만류해도 기어코 달려갔습니다.

구스 사람은 대놓고 압살롬의 죽음을 다윗에게 보고했습니다.

다윗이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구스 사람은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삼하 18:32).

이 구스 사람의 대답에는 압살롬의 신변을 염려하는 다윗의 마음을 이해하는 뉘앙스가 전혀 없습니다.

반역자가 죽었다고, 승리했다는 기쁨이 넘치는 대답이었습니다.


<적용>

1)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다윗의 통곡을 저에게 적용해 봅니다.

하나님이 밧세바 사건 때문에 아들 같은 다윗을 심판하시는 장면을 읽었을 때, 하나님 마음과 아픔과 슬픔을 짐작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다윗을 보면서, 다윗의 범죄 앞에서 통곡하셨을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다윗의 통곡은 십자가로 연결하게 됩니다.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그 상황에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느끼게 됩니다.

주여! 아버지의 마음을 더욱 깊이 깨닫는 아들이 되게 하소서. 


2) 다윗의 통곡을 통해 하나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생각해 봅니다.

왜 하나님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면서까지 저를 구원하셔야 했는지, 그 사랑에 대한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3) 그리고 묵상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셨던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만하시어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셨지만, 결국은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셨는데요.

예수님이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해 순종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4) 구스 사람의 대답을 보면서,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지, 짐작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그동안 계속 성경을 읽고 있고, 교회 사역도 하고 있지만, 정작 저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 심중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아들이 되어야 함을 다시 느낍니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아버지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릴 수 있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저도 십자가 지신 주님을 닮아가려고 애쓰기 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cmy2PYAy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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