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2/23 왕상 1~4장 “일천번제” > 묵상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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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4/02/23 왕상 1~4장 “일천번제” Publish on April 03,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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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741회 작성일 23-04-03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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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독 식구 여러분,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열왕기상을 읽을 차례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사무엘상은 사울 왕국 이야기이고, 사무엘하는 다윗 왕국 이야기였고요.    

그리고 열왕기상은 솔로몬 왕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왕상 3장, 솔로몬의 일천번제에 대해 묵상하겠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는 매우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오해를 많이 받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오해가 있는지, 무엇이 바른 것인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산당에서 제사를??

“(왕상 3:2) 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왕상 3: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솔로몬은 왕이 되고 얼마지 않아,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번제를 지낸 장소가 기브아 산당이었습니다.

산당은 구약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장소였습니다.

산당은 말 그대로 산속에 있는 집(건물, 제사 지내는 시설)이라 볼 수 있는데, 구약에 상당히 많은 경우에 우상숭배 하는 장소로 묘사되곤 했습니다.

그러니, 솔로몬이 산당에서 제사 지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산당은 중립적인 의미였습니다.

산에 있는 제사 터나 제사 공간이었습니다.

후기에는 대부분 그곳에서 우상에게 제사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초기에는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 선지자는 산당에서 제물에 축사하고 백성들과 함께 먹곤 했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처음 만난 때도 사무엘이 산당에 올라가던 길이었습니다(삼상 9:12-14). 


본문에서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성전이 건축되기 전이었고, 넓은 제사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공간이 충분한 기브아 산당에 가서 제사 지낸 것이지, 우상숭배의 장소에서 제사 지낸 것은 아니었습 니다.


2. 일천번 제 vs. 일천 번제??

“(왕상 3:4)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일천 번제는 “일천번 제”가 아니라, “일천 번제”였습니다.

즉, “일천 번을 제사 지낸 것”이 아니라, “일천 마리의 제물을 번제로 바친 제사”였습니다.

물론, 공간이 부족하니까 며칠에 나눠서 제사 지냈을 수는 있지만, 1000번을 반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000마리의 번제물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과 공경을 다 하여 제사 지냈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일천 번제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1000번 제물을 바치며 기도해서 응답과 축복을 받았으니, 지금 성도들도 1000번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천번제 헌금도 같이 유행했습니다.

1000번 예배 참석할 때마다 헌금(제물)을 바치며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마음과 정성은 훌륭합니다.

저도 그 마음을 반대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학자는 1000번 제사지낸 것이 아니라, 1000마리의 제물을 바친 제사라고 해석합니다.

즉, “일천번 제(일천번의 제사)”가 아니라, “일천 번제(일천 마리의 번제물)”인 것입니다.

그러니, 본인이 하나님께 1000번 예배하고 헌금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좋지만,  솔로몬의 일천번제를 모범으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해석인 셈입니다.


왕상 3장은 “솔로몬이 어떤 정성으로 하나님을 감복시켜서 위대한 복을 얻어냈는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이 얻은 지혜가 누구에게서 왔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기의 제사법을 보면, 번제는 구약시대에 자발적인 자기 헌신의 표시로 드리는 것이었지, 무언가를 바라는 목적으로 정성을 바치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불교나 샤머니즘에서 행해지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방식에 가깝습 니다.)

 

3. 솔로몬의 지혜

중요한 핵심은 번제 후의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이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하셨고,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고, 지혜를 얻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 된 것이 바로 이 사건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솔로몬이 지혜를 구해서, 똑똑해졌고 공부도 잘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수도, 부도, 원수 갚는 것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실제로 구한 것을 정확하게 말하면, “재판하는 능력,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왕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정확히 인용하면, “(왕상 3:11)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구한 것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이해하신 것도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였습니다.


물론, 솔로몬은 일반 학문에 대해서도 깊은 지혜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지혜 중에 가장 핵심적인 지혜는 "재판하는 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재판하는 지혜를 구하는 것을 기뻐하셔서, 다른 것들도 보너스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럼, 재판하는 지혜가 왜 중요할까요?

고대 근동에서, 왕이 하는 중요한 두 역할이 있었는데요.

전시에는 장군이 되어 전쟁을 통솔하는 것이고, 평시에는 백성들을 재판하는 것이었 습니다.

● 모세도 백성을 재판하는 것이 큰일이었다가, 장인 이드로의 충고를 듣고 백부장, 천부장 등을 세운 적이 있었지요.

● 사사 시대에 등장한 지도자들을 사사라고 부르는데, 사사는 영어로 “judge”입니다.

사사들이 전시에는 전쟁하는 장군이었지만, 평상시에는 백성들을 재판하는 재판관 이었습니다.

지금 왕정이 세워지긴 했지만, 왕의 역할도 전쟁과 재판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 지금 솔로몬은 자기가 왕이 되었다고, 자기 마음대로(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재판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과 기준으로 재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기준대로 재판하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재판”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재판을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요.

“선악을 분별한다.”라는 말은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떠올리게 합니다.

고대에는 왕이 법을 만들고, 법을 집행했습니다.

그래서 왕이 자신의 주권대로 선과 악을 결정했습니다.

선악을 결정하는 것은 왕의 고유한 권한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에 의해 선악이 결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선악을 결정하기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들이 독자적으로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솔로몬은 왕이 되었지만, 자기 마음대로 그 선악을 결정하길 원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선악에 대한 생각(지혜)을 얻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방식대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겉으론 자기가 왕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의 실제 통치자(왕)는 하나님이고, 자신도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하기 원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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