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2/23 신 8-11장 Publish on February 22,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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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신 8장을 묵상하겠습니다.
8장도 언약 조항들(5-26장)의 일부입니다.
여러 언약조항(율법)을 나열하면서, 모세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 율법을 받으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너희와 언약 관계를 맺은 분이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
이 하나님이 광야에서 너희를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 아느냐??
그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과 맺은 이 언약을 잘 지켜야 한다.”라는 문맥으로 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I. 광야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광야에 서 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40년의 긴 세월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예전에 광야에 대한 동영상을 보았는데요.
잠시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힌다고 합니다.
광야에 잠시 나갈 때도 물을 몇 병씩 가져간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수분이 부족해지면, 금방 탈수증이 오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모든 게 없고, 부족하고, 불편하고, 위험합니다.
광야에는 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고 밤에는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듭니다.
또한, 들짐승들이 먹잇감을 찾아 쏘다니고, 불뱀과 전갈이 득실거립니다.
젊은 군인들도 장거리 행군을 하면 발이 까지고 난리가 납니다.
모래밭, 자갈밭을 걸으면, 맨땅보다 훨씬 힘듭니다.
더구나, 광야에선 농사지을 방법도 없고, 식량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든 광야에 서면 낮아지고, 자존심이 꺾이고,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는 힘들고, 부족한 인생의 대명사입니다.
제가 미국으로 유학 나오기 얼마 전에, 당시 담임목사님이 제게 개인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김 목사야, 미국 가니까 기대되고 흥분되제? 그런데, 착각하지 마라. 미국이 가나안이 아니다. 미국은 광야다. 니는 지금 광야로 가는 기다. 그걸 명심해야 된다. 알겠나?”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미국 오니까, 여기가 광야인 겁니다.
궁핍해지고, 자존심 꺾기고, 바보가 되고, 모든 게 힘들고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학 초기에 얼마나 많이 막막해하고, 한숨 쉬고, 울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모든 면에서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광야 인생이라고 가르쳐 주셨던 말씀을 늘 기억하려 애쓰며 살고 있습니다.
2.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광야가 힘든 곳이긴 하지만, 부족함만 있는 곳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억하심정이 있어서, 고생 구덩이로 몰아넣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 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하나님이 광야를 통해 원하셨던 것은 마침내 이스라엘에 복을 주려 하심이었습니다.
여기서 “마침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복 주시려고, 우리가 복 받게 하시려고 광야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복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땅과 자손과 복을 약속하셨던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광야가 힘들고 어렵기만 한 곳일까요?
아닙니다.
멀리서 사막을 보면, 모래밖에 없는 것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수많은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광야는 축복이 넘치는 곳입니다.
오히려 부족함이 없는 인생, 풍요로운 인생입니다.
3. 만나
광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신 8:3)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전혀 농사지을 수 없는 불모지, 광야에서 하나님은 만나를 먹이셨습니다.
1) 만나는 하늘 양식이요, 기적의 상징입니다.
도저히 사람의 방법으로는 양식을 얻을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양식을 주셨습니다.
2) 그것도 매일 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한 번도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살다 보면, 제 힘으로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문제에 부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대부분 실망하고 절망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그때가 실망할 때가 아니라, 하늘을 바라볼 때임을 알려줍니다.
광야여서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양식을 구할 방법이 전혀 없을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만나를 주시는 타이밍이었습니다.
어릴 때 시골집 마당에 병아리를 키웠습니다.
병아리는 물 한 모금 먹고, 하늘 한번 쳐다봅니다.
시선이란 찬양은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도 시마다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살아야겠습니다.
4. 말씀
3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세상에선 사람이 떡이 있어야 하고, 떡 없으면 죽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요. 밥 먹는다고 사람이 사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죽하면, “니는 밥만 먹고 사나?”란 우스갯소리가 생기겠습니까?
사람이 무엇으로 삽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이스라엘은 그 말씀 체험을 어디서 했습니까?
광야에서 했습니다.
사실 광야란 말이 재미있습니다.
한문으로 광야는 “공허할 광, 들 야(공허한 들판)”입니다.
영어로는 광야가 “wilderness(wild 한 곳, 미개발된 야생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광야(미드바르)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광야를 해석합니다.
1) 역사적으로 보면, 광야는 노예로 살던 애굽 땅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중간 과정입니다.
노예가 자유인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 되고, 하나님의 군대로 변화되는 장소입니다.
2) 어원으로 보면, 광야는 “뒤를 따라가다” 또는 “앞으로 밀어붙이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가축이(소나 양이) 풀을 뜯기 위해 앞으로 나가는 곳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광야도 우기에는 풀을 뜯을 수 있는 공간이 되는데요. 목자들이 양을 몰고 광야로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를 믿고 따라 가기만 하면, 광야에서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단어로 보면, 미드바르는 워드플레이가 가능합니다.
“미”는 장소를 나타내는 접두사이고, “드바르”는 말씀입니다.
즉, 광야는 히브리어로 말씀이 있는 곳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아무것도 없고, 외롭고, 살기 힘든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황량하고, 메마른 곳이어도,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광야는 의미 있는 곳이 되고, 은혜의 장소가 됩니다.
그러고 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고,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저도 인생이 광야에 있을 때, 어려울 때, 마음이 가난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길이 없는 곳에서, 고독한 곳에서, 야생의 장소에서 힘들 때, 그때 더욱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겠습니다.
5. 세세한 것까지 챙기시는 하나님
(신 8: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출애굽은 엄청난 역사였습니다.
200만이나 되는 민족이 노예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큰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필요들을 간과치 않으셨습니다.
광야의 거친 땅을 걷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당연히 신발이 닳고, 발이 부르트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발도 부르트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필요까지 세심하게 챙겨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시 한 편으로 노래했습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말이 안 되는 노래입니다.
광야에는 물도 없고 풀도 없는데, 부족함이 없다고요?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니는 게 겁나지 않는다고요?
그 이유가 여호와가 목자이시기 때문이고,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 논리로는 이게 설명이 안 되는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불가능이 가능해지고, 감사 제목들이 넘치는 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오늘도 저의 머리털까지 세시고, 저의 작은 신음에도 세밀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기 원합니다.
오늘도 믿음의 신비를 체험하며 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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