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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1/04/23 창 10~11장 Publish on February 11,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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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548회 작성일 23-02-1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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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4일(수) 창 10~11장

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을 묵상하겠습니다.

창세기를 읽다보면, 창조-타락-구속(회복)의 역사가 반복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 역사는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창조-타락-구속의 구조속에서 흘러간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텐데요.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이야기들 속에서도 창조-타락-구속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제 읽은 노아 이야기를 보면요.

인간의 죄악이 관영할 때, 하나님은 방주를 통해 의인 노아 가족을 보존하셨고, 홍수후의 세상에서 살게 하셨습니다(창조).

그러나, 홍수 후에 어이없게도 술 취한 노아에게 함이 범죄하는 사건이 생깁니다(타락).

그 후에, 하나님은 셈의 후예를 통해 구속의 여명을 이어가십니다(구속).

오늘 통독 본문인 바벨탑 사건에도 이런 구조를 볼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런 관점으로 바벨탑 사건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은 홍수 심판 중에도 방주를 통해 노아 가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창조).

무지개 언약을 세우고,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고, 사람들이 생존하기 쉽도록 육식도 허락하셨습니다.


2. 그런데,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바벨탑을 쌓기 원합니다(타락).

홍수 이후에 사람들은 또다시 하나님께 대항합니다.

사람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더 이상 퍼지지 않고, 탑을 건설하자고 합니다(창 11:4)

이 탑을 건설하기 위해 당시로선 최첨단 건축 기술을 동원합니다.

벽돌을 견고히 굽고, 역청을 바르는 신공법도 개발했습니다(11:3).

이렇게 열심히 탑을 쌓는 의도는 두 가지입니다.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1) 첫 번째 의도는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선악과의 핵심은 선악과가 사과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영어에는 남자의 목젖을  Adam's apple 이라고 부르잖아요. 하와가 준 사과를 먹다가 목에 걸렸다는….^^;;)

선악을 안다는 것은 몰랐다가 알게 된다(배운다)는 뜻이 아니고, 선악을 판단하고, 실현한다는 뜻입니다.

요즘은 의회가 법을 제정하여 선악의 근거를 만들고, 그 법에 근거해서 재판관이 선과 악을 판단하고, 행정부가 그것을 실행합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왕이 선악의 기준을 세우고, 판단하고, 실행했지요.

 

뱀이 선악과를 먹으라는 유혹은 “하나님이 선악을 판단하는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데 만족하지 말고, 네가 왕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니까, 그동안 매일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창 3:12).

지금 바벨탑을 쌓을 때 “우리가 높아지고,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하는 것이나,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유혹할 때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왕이 되어라”라고 하는 것이나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2) 두 번째 의도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는 것입니다. 

흩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폭군이고, 사람들을 못살게 군다는 뉘앙스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괴롭히려고 흩어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창조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문화명령을 주셨는데요.

홍수 후에 노아와 언약을 맺으실 때도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라고 하셨습니다.

땅에서 번성하고 충만하는 명령(문화명령)은 축복이었습니다.

이것을 주기도문의 언어로 바꾸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실현되길 원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홍수 이후에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야 마땅했습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가 땅에 넓게 퍼져 살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게 되자.”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적으로 꼬아서 해석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에 폭정에 의해 강제로 흩어짐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니, 힘을 모아서 저항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대단한 저항군 흉내를 내었습니다.


3. 그러나 이들은 시도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이 납니다(구속).

하나님은 이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 이들은 더 이상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11:7).

바벨탑은 중단되었고, 사람들은 자연히 언어별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심판에서조차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됩니다.

나선형의 구원을 알기 때문에, 심판의 상황에서조차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로운 구속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준비하십니다.

11장 전반부는 바벨탑 이야기이지만, 11장 후반부는 아브라함의 족보입니다. 

바벨탑 사건후에 익숙치않은 이름들이 나열되는 족보를 읽는 것은 지겹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들 뒤에 드디어 우리가 아는 이름이 나옵니다. 

바로 아브람입니다.

마치 깜깜한 밤이 끝나고, 다시 해가 떠오르는 순간과 비슷합니다.  

12장부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새로운 구속의 역사를 써가십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대항해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멈출 수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꺾을 수 없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항하고 바벨탑에 동참했지만, 하나님은 그중에 아브라함 한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를 통해 이 땅에 새로운 백성들을 만들어 가십니다. 

사사기의 영적 암흑 중에 하나님은 룻을 준비하셨던 것 처럼, 이세벨을 따르는 바알과 아세라의 세력이 온 땅을 지배할 때도 하나님은 엘리야와 7000명의 남은자를 보존하셨잖아요?

마찬가지로, 지금도 바벨탑의 반역의 역사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보존하셨고, 그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셨던 것습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바벨탑의 세상 같습니다.

첨단 과학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며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만의 목표를 성취하려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 인생과 가족을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실 것입니다.

저도 그 한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의 인생과 저의 행복과 저의 영광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2)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면, 언어가 통일됩니다. 

바벨탑의 언어 혼잡은 분명 심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심판은 아닙니다.

예수님 승천 후에,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재하셨을 때, 언어가 다시 통일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님이 마가 다락방에 임재하셨을 때, 예루살렘에는 많은 나라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이 쓰는 언어도 다 달랐습니다.

그때,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설교했는데, 그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다 이해했습니다.

“(행 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라고 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언어가 다시 통일된 것입니다.


또한, 언어 혼잡에는 단순히 심판이란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더 깊은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들어 있습니다.

언어의 혼잡을 긍정적으로 보면, 언어가 다양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계시록은 다양한 민족과 족속이 다 모여 한목소리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경배하고, 찬양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어린양 예수님의 사역은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었습니다(계 5:9).

그리고, 종말에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계 7:9).

사실, 다양성은 우리에게 불편을 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복음안에서 조화를 이루길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저도 이 땅을 사랑하시고, 이 땅을 구속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 원합니다.

그 마음을 이해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저도 넓은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오늘도 다양성을 수용하고 함께 일치를 향해 나아가기 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찬양하고, 복음의 빛을 전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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