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0/23 욥 15~17장, “욥과 엘리바스의 두 번째 대화” > 묵상편지

본문 바로가기

묵상편지

05/20/23 욥 15~17장, “욥과 엘리바스의 두 번째 대화” Publish on May 21,2023 | 관리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07회 작성일 23-05-21 10:59

본문

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욥 15-17장을 묵상하겠습니다.


욥기 4-27장은 욥과 친구들이 3번 논쟁하는 부분인데요. 

어제까지(4-14장) 첫 번째 논쟁을 했고요. 

오늘부터 15~21장에서 두 번째 논쟁을 합니다.

이제, 엘리바스부터 다시 등장합니다. 

15장은 엘리바스 주장이고,

16~17장은 욥의 대답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원어에 가깝게 문자적 의미를 전달해 주는 장점이 있지만, 너무 점잖게 번역해서 느낌을 살리지 못합니다.

새번역 성경 같은 최근 번역본을 참조하시면, 대화의 느낌을 살려 읽는 데 도움이 됩니다.

특히, 욥기 같은 경우엔 상당히 도움이 되실 겁니다. 

(대신, 원래 의미와 살짝 달라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대조하며 보시면 좋습니다.)


I. 엘리바스의 두 번째 충고(15장)

엘리바스는 세 친구 중에 가장 연배가 높고, 학식도 있고, 점잖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대화는 첫 번째 대화보다 더 격앙되어 있습니다.

처음 대화에선 “네가 죄인이니까, 회개해라. 그러면, 복 받는다”라고 했는데요.

둘째 대화에선 복 받는다는 말은 빠지고 “죄인이니, 회개하라”라는 말만 합니다.

위로가 말싸움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네가 지혜롭다고 하는데, 네 말들은 다 헛소리고, 허풍이다. 쓸데없고, 무익한 말들이 끝이 없다(15:2-3).” 

“너만 똑똑하냐? 우리가 모르는 걸 너 혼자 안다고 착각하지 마라.”고 합니다(15:8-9).

엘리바스는 완전히 열 받았습니다. ^^;;


그런데, 말 빨로는 좀 밀리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무기를 들이 밉니다.

10절에 “우리 중에는(즉 나는) 흰 머리도 있고, 연로하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다”라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너 몇 살이야? 나이도 어린놈이 건방지게”라고 하는 거죠.

음……. (...안에 생략된 말들을 다 짐작하시리라 생각합니다. ^^;;)


개역성경은 번역이 너무 점잖습니다.

그래서 말싸움하면서 감정의 불꽃이 튀는 것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훨씬 실감납니다.

예를 들어, 20절을 비교해 볼까요?

“(욥 15:20, 개역)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되었으므로”인데요.

“(욥 15:20, 새번역) 악한 일만 저지른 자들은 평생 동안 분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잔인하게 살아온 자들도 죽는 날까지 같은 형벌을 받는다.”라고 합니다.

지금 엘리바스는 아예 대놓고 욥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충고라 쓰고 욕이라 읽는다.)


엘리바스가 이렇게 화난 이유가 뭘까요?

첫째, 욥이 자꾸 자기는 죄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일 겁니다.

이것은 표면적 이유입니다.

그는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 맑은 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엔 부정하다(15:14-15).”라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일관되게 “하나님은 의롭고, 인간은 악하다. 그리고 징계는 범죄의 결과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욥이 자꾸 자기는 죄 없다고 하니, 부아가 치민 것입니다.


둘째, 이면적 이유는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말이 먹히지 않으니까 열 받은 것입니다.

“나 많이 알아(15:9).  

나 나이도 많아(15:10).

근데, 왜 내 말 무시해(15:11)?”


저는 혹시 제 말이 먹히지 않는다고 화내는 때는 없는지 돌아봅니다.

희진이가 고등학교 시절에 뾰족한 사춘기를 보냈는데요.  

그때 저도 희진이에게 자주 화가 났었습니다. 

그런데, 희진이에게 화가 나는 경우를 돌아보니까, 제가 학식도 많고, 나이도 많고, 자기 아빠인데, 제 권위를 무시한다고 느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딸에게 꼰대 짓 한 것을 회개합니다. ^^;;

더 마음을 열고, 내려놔야겠다 반성해 봅니다.


II. 욥의 두 번째 항변 (16~17장)

엘리바스의 정죄를 들은 욥도 목소리가 격앙됩니다.

욥도 친구들에게 격정적인 말을 쏟아냅니다.


1)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16:2)”라고 합니다.

이것을 풀어서 말하면, “나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란 말입니다.

모순어법이죠.

겉으론 위로한다고 하면서, 속으론 더 아프게 후벼 파고 있다는 말입니다.


2) 어떤 말들은 혼잣말로 한탄하는 것 같습니다. 

“아, 친구들이 나를 모욕하고, 뺨을 치는구나(16:10)! 

난 지금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사람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17:6)! 

이대로 가다간 죽을 것 같다(16:22).

아니, 이젠 나도 기력이 없고, 무덤에 들어갈 일만 남았다(17:1).”


욥의 탄식은 점점 더 깊어 갑니다.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16:20)”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 바가 다 끊어졌구나(17:11).”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17:15)?”

특히, 13절과 16절에는 음부(스올)가 반복해서 나오는데요. 

음부는 히브리어로 스올이라 부르는데, 죽은 자가 거하는 곳, 무덤이란 뜻으로 주로 쓰입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카드는 죽음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욥이 점점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눈물만 흘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위로랍시고 하는 말들이 실은 공감도, 이해도, 배려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욥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저주하는 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는 심정이었기 때문입니다(17:6).


혹시 제가 생각 없이 내뱉은 한 마디가 다른 분들에게 상처를 드린 적은 없는지 조심스럽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저를 돌아봅니다.


주님,

제게 따뜻한 가슴과 부드러운 혀를 주시옵소서.

섣부른 충고를 삼가게 하소서. 

갑자기 당한 어려움 앞에서 막막해하는 그 심정을, 소망이 끊어진 그 절망감을,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못하는 그 고독감을 공감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품어주고, 보듬어 주고, 기도해주는 위로자가 되게 하시고, 함께 희망을 찾아가는 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진정한 위로자, 진정한 친구가 되게 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IF7P2J6FX3A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