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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5/23/23 욥 22~24장, “엘리바스의 세 번째 충고” Publish on May 24,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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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68회 작성일 23-05-2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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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욥 23-24장을 읽을 차례입니다.  

욥기 4-27장은 욥과 친구들이 3번 논쟁하는 부분인데요.

그중에 오늘 말씀은 엘리바스와 욥이 세 번째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는 마치 권투 시합과 비슷합니다.

욥은 라운드마다 세 친구를 상대로 힘겹게 싸우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라운드에서 엘리바스가 다시 등장합니다.


대화 내용은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앞에서 했던 말을 또 하면서, 인과율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싸움의 양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I. 22장 (엘리바스의 세 번째 충고)

엘리바스의 모습을 보면, 우리가 해선 안 되는 게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1. 이기려고 집착하면 안 됩니다.

앞의 대화에서 엘리바스는 “네가 고난 받는 것은 불의하기 때문이고, 범죄했기 때문이다.”라고 했고, 욥은 “나는 무죄하고, 의롭다.”라고 주장했잖아요.

그런데 엘리바스가 욥을 말발로 이기질 못합니다. 

그래서 세 번째 대화에서, 말을 바꾸어서 공격합니다.

(욥 22: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무 높으신 분이어서, 네까짓 존재의 의로움은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도 못 미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 비겁한 말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엘리바스(와 친구들)는 욥이 의롭지 않다고 했었잖아요?

그런데 자기들 논리와 말발로는 욥이 의롭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말을 슬쩍 바꿉니다.

“네가 의롭다고 한들” 하면서, 그동안 공격하던 욥의 의로움에 대한 주제를 슬쩍 넘겨 버립니다.

이젠 욥의 의로움은 별것 아니라고 합니다.

결코 욥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논리로 공격합니다. 


2. 이기려고 거짓말하면 안 됩니다.

(욥 22:6) 까닭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욥 22:7) 갈한 자에게 물을 마시우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욥 22:8)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가 거기서 사는구나.

(욥 22:9)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큼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의로운 욥을 공격하기 위해서, 없는 말을 지어내고, 거짓말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나쁜 행동은 참 잘 배우는 것 같습니다.

앞에 20장에서, 소발이 욥이 하지도 않은 행동으로 거짓 고소를 했는데요(20:19).

엘리바스가 그걸 금방 배워서 써먹습니다.

우리 속담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욥도 부자이니, 잘못된 방법으로 부를 쌓았을 것이다. 뭔가 잘못을 했을 것이다.”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그걸로 마구 두드려 보는 것입니다.

“이말 저말로 두드리다 보면, 먼지 하난 털리겠지”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말고” 라는 입장입니다. 


3. 그리고 이렇게 말을 맺습니다. 

(욥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이 구절만 읽으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맞는 말 대잔치이지만, 복장 터지게 하는 말입니다.

그 구절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지만, 문맥은 틀렸습니다.

욥에게 적용되지 않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성경을 얼마나 악용할 수 있는지, 그 예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사람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4. 왜 엘리바스와 친구들이 이렇게까지 할까요?

1) 자기 생각의 틀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욥도 자기가 생각하는 틀에 가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뜻대로 안되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2) 자기 말이 안 먹히는 걸 못 참는 것입니다. 

29절은 개역 성경과 개역 개정 성경의 번역이 살짝 다른 부분입니다.

(욥 22:29, 개역)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욥 22:29, 개역개정)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이 부분은 좀 더 이해하기 쉬운, 개역 개정의 번역으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너를 낮추거든 너는 교만했노라고 말하라(22:29).” 

엘리바스는 지금 “사람들”이라 말하고 있지만, 실은 엘리바스 자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낮추면, 너는 듣고 납작 엎드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말이 먹힐 때까지, 욥을 짓밟고 있는 것입니다.


II. 23-23장 (욥의 대답)

엘리바스는 “하나님께 겸손히 나가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것이다.”라고 했잖아요?

그것에 대해, 욥은 반박합니다.

(욥 23:8)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욥 23:9)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지금까지 욥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욥 10:2).”

그런데 욥의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은 계속 침묵하고 계십니다(9:16).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욥은 더욱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과 화목을 회복해야, 자기도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말합니다.

“나도 하나님께 말하고 싶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싶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지런히 찾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도대체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 찾는다고 이리저리 헤매는데, 아무리 찾아도 못 찾는 순간...

이 순간은 고난과 절망이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마치 불구덩이 속에, 용광로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의 시점에서 욥은 소망을 발견해 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23:10, 개역개정).”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바로, “그러나”입니다.

개역한글 번역에는 “그러나”가 없습니다.

(욥 23:10, 개역)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런데 개역 개정개정 번역에 “그러나”를 추가해서, 뜻을 더 정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욥 23:10, 개역개정)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나는 못 찾고 있다. 그래서 답답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길을 아신다.”라고 합니다.

“모르고 있는 나”와 “다 알고 계신 하나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내가 가는 길을 마치 GPS 추적하듯 다 알고 계시다 합니다.

그러니 나를 못 찾을 염려 없고, 나를 잃어버리실 염려도 없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정확하게 나를 찾아오실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못 발견하고, 못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내 위치도 아시고, 내게 나아오실 수 있는 분이시고, 내게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임을 깨달았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가 정금(순금)같이 나올 것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 “주님이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순금)같이 나올 것이다”라는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은 힘들어도,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로 이 어려움을 통과할 것이다.

내가 용광로 불 속에 들어있어서도, 그 불에 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올 것이다.”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살다 보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때도 있습니다.

주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가 주님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을 때라도, 저에게 임재하시고, 일하길 멈추지 않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길을 만들고, 기적을 행해 주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저도, 주님이 저를 단련한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게 될 것을 믿습니다.

주여, 저를 단련하시고, 저를 인도하소서.


https://www.youtube.com/watch?v=XaWvkDyxSZ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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