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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5/30/23 욥 40~42장, “고난의 끝” Publish on May 31,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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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17회 작성일 23-05-3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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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이제 욥기 대장정이 끝나는 순간입니다.

오늘은 본문이 길진 않지만, 중요한 내용이 많습니다. 

구조상으로 보면, C’, B’, A’를 포함합니다.

A. 욥의 고난 (1~2장)

B. 욥의 탄식 (3장) 

C. 친구들과 3번의 논쟁 (4-27장)  

D. 지혜는 어디 있나? (28장)

C’ 3번의 발언 (29~42장) 

B’ 욥의 중보기도 42:7-9 

A’ 욥의 회복 42:10-17


드디어 하나님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욥이 질문해 왔던 것에 Yes, No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읽다 보면, 내용이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길게 말씀하시니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저 같으면, 이게 욥의 시험이었다고, 사단의 고소를 이겼다고 직접적인 대답을 할 것 같은데요.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아느냐?” 하시며 질문법을 사용하십니다. 

38-39장에서 첫 번째 질문을 하셨고, 이제 두 번째 질문이 이어집니다.


I. 40장 (하나님의 두 번째 질문)

하나님이 두 번째 질문을 시작하십니다.

(욥 40:6)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욥 40:7)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어제 묵상했던 것처럼, 이것은 “네가 이걸 알 리가 없지.”라고 기죽이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는 알아야 한다. 내가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하고, 내가 큰 것만큼 네가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는 부르심입니다. 

“욥아, 너는 네 존재와 하나님의 자녀 됨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네가 알지 못하는 깊은 지혜의 자리로 인도할 것이다.”라는 초청입니다.


1) (욥 40:8)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지금까지 욥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놓지 않습니다.

야고보서에서도 등장할 만큼 욥의 인내는 대단합니다. 

물론, 그의 인내속에는 하나님에 대해 이해 못하는 부분과 불평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와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나 자기가 당한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억울함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거죠.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한쪽에 해결되지 않는 질문과 비명들을 가지고 사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했으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사역과 성품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아직 모자라는 것이죠.

(반대로,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이해하는 범위 내에 있다면, 하나님이 아니신 거겠죠. ^^)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모든 창조물의 통치자요, 공의로우신 분이요, 목적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걸 인정한다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부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을 것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미지의 부분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일하실 것을 인정하고 열어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렵죠. 잘 안됩니다. 

남에게 말하기 쉬운데, 내 상황이 되면 적용이 안 됩니다.


2) (욥 40:14)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사람들은 누구나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고 싶어 합니다(10절).

그런데 그것이 우리 힘으론 불가능합니다.

우리 오른손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물에 빠졌는데, 제 오른손으로 제 머리채를 잡아당겨 물 밖으로 끌어낼 수 없잖아요?

(즉, 자기를 셀프 구출 할 수 없잖아요?)

밖에서 누가 잡아당겨 줘야 하잖아요.

우리는 우리 손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버둥거리는 게 헛일이란 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 어려움 중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를 구원해 나가고 계신 좋은 분이란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신정론).

그래서 내 손에 힘을 풀고,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는 자리로 나가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한 위엄과 존귀로 단장해 주시고, 영광과 영화를 입혀 주십니다(41:10).

하나님이 우리를 미천한 종이 아니라, 대단한 존재로 인정해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 그런 의미에서, 인내는 단지 참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야고보서는 욥의 인내를 인용하는데요.

야고보서의 초점은 “욥이 잘 참았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비와 긍휼히 크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선함과 의로우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크신 계획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유명한 대사도 “너는 계획이 있구나” 이었었죠. ^^;;)

 

II. 41장 (하나님의 두 번째 질문 계속)

처음 질문에서 하나님은 자연과 들짐승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오늘 두 번째 질문에서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개역 성경엔 “하마”와 “악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베헤못”은 나일강 속에 사는 큰 괴물이고, “리워야단”은 바닷속 에 사는 큰 괴물입니다.

이들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인간을 두렵게 하는 힘센 존재들입니다. 


1) 베헤못과 리워야단은 고대의 사람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그럼, 없으면 가장 속 편하겠죠. 

하지만, 그들에게는 있는 게 현실이잖아요. 

우리도 고난이 없으면, 가장 속 편하겠죠. 

하지만, 날마다 어려운 일 만나는 게 현실입니다.

부정한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지요.


2) 하나님은 그 괴물들을 묘사하면서, “네가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느냐? 네 맘대로 조정할 수 있겠느냐?” 하십니다.

당연히 No. 욥이 할 수 없죠.

“욥아, 사람이 하마 괴물과 악어 괴물을 다룰 수 없지만, 나는 할 수 있단다.

베헤못, 리워야단이 아무리 힘이 새봐야 피조물이야. 

그것들도 내가 다스린단다.”라고 하십니다.

이걸 욥의 고난에 적용하면요. 

“너에게도 해결할 수 없는 고난과 질문들이 있지? 

그런데, 그것들을 다스리는 건 누구겠니?

마치 내가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다스리듯이, 네가 겪는 고난도 내가 다스리고 있단다.”라는 것입니다.


III. 42장 (욥의 중보기도와 회복)

욥의 회복의 핵심은 5절입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 구절은 지난번에 설명 드린 적이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오늘은 5절 앞뒤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5절을 바탕으로 설명드리는 것입니다.)


1) (욥 42:1-2)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욥은 드디어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합니다.

엄청나신 하나님, 언제나 옳으신 하나님을 맞닥뜨린 것입니다.

그러자, 자기가 내내 씨름했던 것들이 너무 사소하고, 쓸데없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객관적으로는 너무나 아픈 큰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일이 더 크신 하나님 앞에 서니 상대적으로 한없이 작아진 것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 하다가 빌딩 옆에 서버린 느낌인 거죠.)


2) (욥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이것은 회개하라고 하던 소발의 주장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압도되어 겸손히 무릎 꿇은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 소서.” 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3) 여기에서 회개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a. 욥이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모습입니다. 

b. 욥이 하나님의 답변을 듣고,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를 깨닫고 ‘위로’를 얻는 모습입니다.


저는 회개와 위로가 함께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지금까지 제가 까불었던 것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은 제 생각보다 크십니다. 제가 당한 고난이 손해가 아니고, 억울한 일도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저 하마와 악어 를 만드셨고, 온 창조물을 좋게 여기시는 것같이, 저에게 일어난 모든 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에서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지금껏 그것을 제대로 모르고 말하고 행동했던 것을 잘못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 계심을 깨닫고 위로를 얻습니다.”

 

IV. 욥기의 결말  

1) (욥 42: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하나님은 욥이 옳다고 인정하셨고, 잘못한 친구들은 욥의 중보를 통해 용서를 빌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욥기는 끝이 납니다.

성경 동화는 욥기의 결론에서, 욥이 두 배로 부자 되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친구들이 하나님에 대해 듣게 되는 것”이 재산과 자녀를 두 배로 받는 것보다 먼저 나옵니다.

형제, 자매, 친구들이 욥에게 와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슬퍼하고, 위로했다고 나옵니다.

a. 욥을 알던 모든 이들이 모여들었고, 

b. 욥을 만나서 그의 회복을 직접 보았고, 

c. 욥이 그동안 어떤 일을 당했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는지 사연을 들었고,

d. 그 말을 들으면서 슬퍼하기도 하고, 위로하기도 하는 반응을 했다는 말입니다.  

욥이 회복되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이 알려지게(known) 하십니다.

(하나님이 알려지게 하는 것은 구약에서 발견되는 선교의 핵심 개념입니다.)


2) 저의 인생도 이렇게 하나님을 알리는 통로로 사용되길 원합니다.

제가 부자 되고, 명성을 얻고, 자녀가 잘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그것들을 우상처럼 붙들고 있진 않는지 돌아봅니다. 

저의 삶을 통해, 저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분들이 많이 생기길 소원합니다.


이번에 욥기를 묵상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낍니다.

사실 저도 제 인생을 잘 모릅니다.

해답 없는 질문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답을 얻는 것보다, 비록 내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이 선한 분이시 니, 제 인생도 선하게 이끌어 가실 것을 믿겠다고 고백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aWvkDyxSZ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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