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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5/31/23 욥 42장, “중보하는 욥” Publish on May 31,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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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40회 작성일 23-05-31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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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이제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욥기의 마지막 장을 읽을 차례입니다.

욥기는 처음과 끝이 가장 중요하고, 메시지도 많습니다.

어제 통독 본문이 41장까지이지만, 문맥을 설명하기 위해 42장까지 대충 설명을 드렸 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42장에서 중보하는 욥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해 보겠습니다.


I. 욥의 중보

(욥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 42: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하나님은 친구들의 말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판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욥에게 가서 제사를 드려 달라고 부탁하라고 하셨습니다.

(“욥에게 가서… 제사를 드리라”는 구절은 욥에게 제사를 드리라는 말이 아니라, 욥에게 제사를 드려달라고 부탁하라는 표현입니다.)

욥을 제사장으로 세우시는 장면입니다.

그동안 욥이 중보자를 요청했는데, 이제는 욥을 중보자로 세우고 계십니다.

제사장은 중보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대장부처럼 우뚝 서라고 요청하신 후에, 욥에게 바라신 역할은 제사장 역할이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역할이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욥처럼, 세상을 중보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묵상하게 됩니다.


더욱이, 이 당시 믿음의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조차도,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대부 분 자신이나 가족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욥이 친구들을 위해 중보하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 니다.

실은 최초의 제사장이요,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 멜기세덱도 이방인입니다. 

이것과 하나님의 선교를 연결시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고 있지 않으십니다.

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열방을 품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II. 이렇게, 욥이 제사장으로 세움받는다는 관점에서 42장을 읽으면, 앎과 사역에 대한 새로운 묵상을 하게 됩니다. 

욥은 고난을 통과한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욥 42: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욥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의 전능하심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고백합니다.

(욥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기 결론 부분의 핵심은 “이제는 주님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욥의 고백입니다(5절).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귀로 들었지만, 이제는 눈으로 주님을 뵙는다고 고백합 니다.

귀로 들었다는 것은 간접 경험을 말하는 것이고, 눈으로 본다는 것은 직접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안다는 단어를 “yada”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했을 때, 마리아가 안다는 단어를 사용했는 데요.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 이까?”

여기에서 마리아가 사내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평생 남자라는 생명체를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남자와 성적인 경험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앎의 의미를 욥의 고백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42장에서, 욥이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 직접적인 체험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정립하게 되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면서, 하나님께 불만하던 자신을 회개합니다.


우리도 살면서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모조리 알면 속이 시원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욥기를 통해 깨닫는 것은, 그 고난이 우리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할 것임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존재(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욥이 고난이라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알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에서 “모든 것”에는 우리의 고난과 우리의 아픔도 다 포함되어 있는 거죠.

그 모든 고난과 아픔이 다 협력해서 결국은 선을 이룬다는 고백입니다.

즉, 고난과 아픔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 수 있고, 그런 앎을 통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셔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셔서 온전하게 되셨고, 참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고난도 우리에게 예수님을 닮아가는 순종을 배우게 할 것이며, 예수님처럼 중보 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할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과한 후에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하나님이신지요?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 니라.”

(시 92:5)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하나님은 내 생각 속에 가두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 생각의 울타리 속에 가둘 수 있는 작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이고, 나의 울타리조차 만드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III. 고난의 이유를 묻는 욥에게 하나님은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답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죠.

대신에,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고난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욥에게 알려주십니다.

고난의 한가운데 우리는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욥의 고백처럼 인간에 관한 넘어 계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욥이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고난 중에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한 뒤에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과 함께 하시고, 우리 곁에 계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위대한 일을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고난을 이겨내도록 응원하고,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가장 정확한 타이밍에,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공급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선하고,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한 예가, 흑암 강보입니다.

(욥 38:9)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의복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이 구절은 독특합니다.

하나님이 막은 게 아니라 감싼 것이라 하십니다. 

암흑으로 감싸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둠속에서도” 보호하셨다는 말은 자주 접하는데요.

그런데 “어둠을 통해서” 보호하셨다는 표현은 생소합니다. 

대부분 어둠은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입니다.

하지만, 구약에서 암흑은 가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욥기 38장에서도 하나님은 그 “어둠을 통해” 보호하셨다고 합니다.  

암흑이 우리를 감싸고 보호하시는 통로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속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수 있고, 우리도 더욱 든든히 설수 있게 됩니다.


IV. 다 알고, 다 이해하고 사역할 수는 없습니다. 

욥기의 큰 주제중 하나는 “앎, 지혜”입니다.

왜 하나님이 질문들은 70개나 하셨을까요?

그 질문들은 모두 다 욥은 알지 못하고, 할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 질문들을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욥은 하나님께 질문해 왔습니다.

자기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이유를 묻는 욥에게, “고난의 이유는 인간의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고 말하고 계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가르쳐 줘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저에게 태양계의 신비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역학 같은 것을 설명하면, 제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단언컨대, 한마디도 못 알아 들을 것입니다.

(저의 무식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


욥도 지금 자기 인생의 boundary도 제대로 이해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주의 신비에 대한 질문을 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질문에도 답을 못하는데, 더 어렵고 심오한 고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할 수 있겠으며, 답을 가르쳐 준다 해도 알 수가 있겠습니까?

모른다는 것입니다.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이 고난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는지, 왜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겪는지 다 이해할 수는 없습 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다 알 수 없지만,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신뢰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다 알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맡기시는 사역도 힘껏 감당하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나는 잘 몰라도, 나는 능력 없어도,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가장 필요한 것으로 공급해 주실 것이고, 가장 선한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 23편과도 연결되는 주제입니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광야에서 양떼들이 모든 길을 이해하면서 걸어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어딘지 알지 못해도 목자만 부지런히 따라다니면, 안전합니다.

비록 아골 골짝 빈들을 지날 때도 있지만, 목자의 인도만 따라가면, 안전하게 통과하는 것입니다.

결국,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받는 것입니다. 


내가 알 수도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인정하고, 

좋으신 하나님이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며 살아가길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내게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면서, 죽도록 충성하며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God is good all the time!


https://www.youtube.com/watch?v=eOxiiPm2B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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