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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6/02/23 시 7-12편, “11편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Publish on June 02,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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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63회 작성일 23-06-02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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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11편을 묵상하겠습니다. 


11편은 비교적 짧지만, 인상적인 이미지가 나오는 시편입니다.  

1절에는 새의 이미지가 나옵니다. 

(시 11: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이 새는 파닥거리는 작은 새, 참새입니다. 

다윗 자신입니다. 

지금 이 새는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위기 상황입니다. 

사냥꾼의 화살이 새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이제 손가락만 놓으면 화살이 몸을 꿰뚫을 것이다.

마치 첩보 영화에서 저격수가 망원렌즈로 겨냥하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미 십자 격쇄의 한가운데에 머리통이 들어와 있습니다. 

손가락만 당기면 그 자리에서 쓰러질 상황입니다. 

다윗은 쫓기며 살았던 경험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지금은 아주 위급한 상황입니다.


이때, 다윗의 친구들은 다윗에게 “새 같이 ... 산으로 도망하라”고 충고합니다. 

그 이유는 악인이 활을 당겨서 쏘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뜻 들으면, 합리적으로 들리는 충고입니다.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고, 거기에 적절한 대안을 제시한 것 같습니다. 

숲속으로 도망가면, 사냥꾼이 쫓아오기가 어렵잖아요.  

또한, 숲에는 숨을 곳도 많고, 사냥꾼은 추격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친구들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피하였고, 주님만을 의지했습니다.

  

만일 제가 다윗처럼 위험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봅니다.  

과연 주님께 피하고, 하나님 안에서 안전할 방법을 찾았을까요?  

아니면, 산으로 도망가라는 친구들의 충고를 들을까요? 


I. 다윗이 하나님께 피한 것이 왜 잘한 일일까요? 

1. 주님만이 안전한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외에 안전한 곳은 아무 곳도 없습니다.

주님 외에 의지할만한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친구도, 부모도, 자식도 의지할 대상은 아닙니다.

(사랑해야할 대상이지요.)

사람을 의지하면 반드시 실망하고, 사물을 의지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지할 곳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이고, 우리의 산성이 되어 주시는 줄 이 아침에 다시 고백합니다.

 

2. 사람의 충고는 그럴 듯해 보일 뿐, 진짜로 믿을 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충고는 재미가 없습니다. 뻔한 소리 같습니다. 

반면에, 인간적인 충고는 겉으로 보면,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산으로 도망가라는 충고도 굉장히 합리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좀 더 정확하게 상황분석을 해보면요. 

산으로 도망가는 것은 죽을 길입니다. 

이 충고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계산이 빠져있습니다. 

화살이 날아오는 속도와 참새가 날아가는 속도의 차이입니다. 

누가 더 빠릅니까? 

화살이 더 빠릅니다. 

더구나, 이미 사냥꾼의 화살은 참새를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참새가 파닥거려서 산까지 날아가는 동안에 화살은 참새의 몸통을 꿰뚫을 것입니다. 

이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섬뜩해 집니다.

인간적인 충고, 합리적인 충고에 너무 혹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산까지만 날아가면 안전하다”는 것은 “산으로 날아가는 도중에 화살에 맞아 죽으라”는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충고와 합리적인 계산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려고 애써야 하겠습니다. 


II. 터가 무너질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 11: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다윗의 상황이 이해가 됩니다.

터가 무너지고, 기초가 흔들리면, 사람이 살 수가 없지요.

우리도 살다보면, 믿었던 가족관계, 친구관계가 무너지고, 튼튼했던 사업이나 직장과 건강의 터가 무너지는 때가 있으니까요. 

그럴 때, 우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느낌이 듭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살길이 막막합니다.


이렇게 터가 무너졌을 때, 다윗은 어떻게 했는지 4절에 나옵니다. 

(시 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우리가 터전 삼아야 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보좌를 터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시편 11편은 터가 무너지는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피해야 한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각과 계획을 터전 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주권과 통치를 우리의 터전 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십니다. 

보좌는 통치자가 앉는 의자입니다. 

즉, 통치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란 말은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계시고, 여전히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 는 말입니다.

3절과 연결시키면, “세상의 터는 흔들려도 하나님의 보좌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은 끝내 성취된다”는 고백입니다. 

  

둘째는 성전을 우리 터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성전에 갇혀 계시고, 성전 밖에는 안 계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고, 특별한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된 후에도 법궤가 돌아오는 것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법궤가 돌아올 때,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전을 짓고 싶어 했었습니다.

다윗의 신앙은 성전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1) 성전 중심 신앙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대학생 때 SFC라는 기독학생단체에 참여했었는데요. 

기본 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이 교회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주일예배 참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본입니다. 

교회 중심이란 말은 그 이상을 요구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2) 성전 중심이 단지 예배당 건물 중심이란 말도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중심의 신앙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나에게 임재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이란 말입니다. 

저는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기를 소원하며 사는지 돌아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경험하고, 동행하며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고, 행복한 길이기 때문입 니다. 

요즘 많은 현대인들이 나 중심으로 살고, 내 가정 중심으로, 직장 중심으로 사는 게 현실입니다.

자기 입장과 자기 생각을 중심해서 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저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주님,

제가 작은 참새 같은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산으로 도망가지 말게 해 주시고, 하나님 품으로 도망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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