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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9/18/23 나 1-3, “1장 니느웨 심판” Publish on September 18,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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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5회 작성일 23-09-1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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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나훔 1장을 묵상하겠습니다.


나훔은 책도, 선지자도 우리에게 그리 친숙치 않은 성경 중 하나입니다.

선지자 나훔은 나훔서에만 나옵니다. 

엘고스 사람이라고 나오지만, 엘고스가 어디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나훔서의 주된 메시지는 니느웨의 심판입니다.

앗수르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을 끼고 세워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핵심 국가였습 니다.

이미 이스라엘과 애굽을 삼키고, 고대 근동을 통일한 대제국이었습니다.

그런 앗수르의 수도가 니느웨입니다.

니느웨는 거대한 도성이었습니다.

성곽 높이가 30m이고, 폭은 4대의 마차가 한꺼번에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성곽의 길이가 130km에 달했습니다.

그 성곽 둘레에는 넓이 42m, 깊이 18m의 해자(인공수로)를 만들어서 외적의 공격에 대비 했습니다.

그 시대에 이런 시설을 공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대제국의 수도요, 난공불락의 요새라도,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으니, 멸망한다고 예언을 주시고 있습니다. 


나훔서는 요나서의 후속편 역할을 합니다. 

요나가 백 년 전에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예언했는데, 회개하여 하나님이 진노를 멈추신 적이 있습니다(욘 3, BC 760년경).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면서 다시 악해졌습니다. 

나훔이 다시 니느웨의 심판을 예언했습니다(BC 650-620).

그러나 이번엔 회개하지 않았고, 결국 악명 높던 니느웨는 바벨론에 의해 함락 당했습니다 (BC 612). 


나훔서 1장은 니느웨의 멸망 선포, 2장은 멸망의 내용, 3장은 멸망의 이유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멸망을 선포하면서, 이런 선포를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설명합니다.


1. 하나님은 질투하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나 1: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1) 여기에서 “보복”은 개인적인 복수가 아니라, 법적인 복수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당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경찰이 그 강도를 잡아서 재판을 받게 하고, 몇 년간 형을 살게 하잖아요.

이것이 국가가 강도당한 사람을 위해 복수해 주는 것입니다.

재판을 통한 복수, 법을 통한 복수입니다.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지요.


2) “질투한다(jealous)”라는 표현은 연애할 때 애인에게 질투하는 상황에서 많이 쓰입니다. 

jealous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많이 쓰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질투, 긍정적인 질투도 있습니다. 

Jealous(질투하는)와 zealous(열정적인)는 어원상 사촌지간입니다.

(라틴어 zelosus라는 한 단어였는데, 나중에 zealous(열성적인)와 jealous(질투하는)으로 분리되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도 질투(Kinah, 키나)는 문맥에 따라 jealous로 번역하기도 하고, zeal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질투하는 하나님(a jealous/zealous God)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질투한다는 것은 jealous이기도 하지만, burn with zeal이기도 합니다.

부당하게 질투에 불타는 것은 나쁜 것이지만, 정당하게 사랑하고, 사랑을 요구하고, 열정을 가지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가령, 남편이 바람피우는 아내에게 “나만 사랑하고, 다른 남자는 사랑하지 말라”고, “당신이 그런 모습 보면 내 속에서 불이 난다”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요구입니다.

(호세아의 내용이 이것이잖아요.)


하나님은 a Jealous God(질투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눈을 돌리고, 관심 가지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을 절대 용납지 않으십니다.

앗수르가 강대국처럼 보이니까, 관심 가지고, 의지하려고 하고, 그 종교까지도 수입하려는 것을 절대 용납지 않으십니다.

남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조공을 바치고, 우상 제단이 멋져 보여서, 그것을 본떠서 놋제단을 만들어 성전에 두기도 했습니다(왕하 16장).

아하스가 우상에게 마음 뺏긴 것을 보실 때, 하나님 마음에 천불이 나고, 질투가 나는 것입니다.

이 질투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당연히 받을 사랑을 빼앗겼기 때문에 하는, 너무나 정당한 질투이지요. 

 

동시에 하나님은 a Zealous God(열성적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BC722)은 하나님의 심판 막대기로 사용된 것이었습 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너무나 잔인하게 했습니다.

북이스라엘 주민들을 앗수르 곳곳으로 강제로 이주시켰고, 남아있는 주님들은 이방인들과 강제 결혼시키고 혼혈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민족성이 완전히 사라지게 했습니다.

또한, 남유다에도 침공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랍사게와 산헤립은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게 건지겠느냐?” “히스 기야의 신들도 그 백성을 내 손에서 구원하지 못하리라”라고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사 18, 대하 32).

그리고 수많은 백성을 학살하고, 학대하고, 약탈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랑하는 백성들의 핍박을 보면서, 하나님 마음에 불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을 핍박하는 대적들에 투기하고, 보복하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바다가 말라버리고, 산이 진동하여 녹아버리고, 바위도 깨집니다 (1:4-6).

약탈자 앗수르가 도리어 약탈당하고, 왕궁이 불타고, 사람들은 끌려갑니다(2:1-8). 

니느웨가 황폐하게 됩니다(2:10).


하나님이 질투의 하나님이고, 보복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요, 공의의 하나님이란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위해 공의의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2.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분입니다.

“(나 1: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사하지 아니하시 느니라...”

나훔은 하나님을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화내는 다혈질이란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좀처럼 화내지 않는 분이시고, 되도록 화를 더디 내시는 분입니다.


이 구절은 요나서를 떠올리게 합니다.

“(욘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 로우 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요나는 자기가 다시스로 도망갔던 이유가 결국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 니느웨를 용서하실 줄 알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것은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인애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란 표현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니느웨가 지금이라도 회개하면 돌이키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는 7절에서도 이어집니다.

“(나 1: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제게 오래 참으며, 제가 회개하길 기다리시고, 은혜를 구할 때 은혜 주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어려움 당할 때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대적을 물리쳐 주시고, 갈길 몰라 헤맬 때 길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원래 하나님은 이렇게 좋은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셨지만,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니느웨가 얼마나 악독했으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 더는 참지 않으실 지경까지 되었을까요?


그런데, 이게 남 얘기가 아님을 발견합니다. 

바로 제 눈앞에 있는 상황입니다.

긴말할 필요 없이, 지금까지 저 같은 죄인들을 참으시는 것만 봐도 얼마나 좋으신지, 많이 참으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 모습을 보면, 얼마나 뺀질거리고 있는지, 얼마나 게으른지요. 

겉으론 거룩한 척하면서, 실은 회칠한 무덤같이 살고 있는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이용하고 있음도 발견합니다.

마치 인내의 고무줄이 터지기 직전까지 늘려보자, 최대한 버텨보자는 심산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저의 얄팍한 수를 모르실 리 없습니다.

진노하시기 전에, 아직 참고 계실 때, 어서 주님께 돌이키고, 회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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