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0/23 습 1~3장, “3장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 묵상편지

본문 바로가기

묵상편지

09/20/23 습 1~3장, “3장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Publish on September 20,2023 | 관리자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6회 작성일 23-09-20 10:31

본문

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스바냐서 3장을 묵상하려 합니다. 


스바냐는 ‘히스기야 왕의 5대손’입니다(1:1).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왕족 출신의 선지자입니다.

왕족이니까, 평소라면 아주 여유롭게 잘 살 수 있잖아요.

그런데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이때는 여호야김 왕 때입니다.

여호야김 다음에 여호야긴이고, 그다음 시드기야를 끝으로 나라가 망합니다.

스바냐가 예언하던 때가 BC 630년경 입니다. 

BC 586년에 나라가 망했으니까, 겨우 50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멸망이 눈앞에 와있는 상황입니다.

사회는 혼란하고, 나라는 어지러웠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고, 하박국과 예레미야와 비슷한 시대에 예언했습니다.


I. 심판의 선포

스바냐서는 심판의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3장에서도 시작부터 예루살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습 3:1)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찐저!”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패역하고 더러운 곳이라고 합니다.

원래,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도성, 거룩한 도성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습 3:3) 그 가운데 방백들은 부르짖는 사자요, 그 재판장들은 이튿날까지 남겨 두는 것이 없는 저녁 이리요,

(습 3:4) 그 선지자들은 위인이 경솔하고 간사한 자요, 그 제사장들은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하였도다.”

정치, 종교 할 것 없이 다 썩었고 타락했습니다.

한쪽으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은 우상을 숭배하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약한 자를 짓밟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하나님이 우리 성을 버리실 리가 없다고 거짓 평화를 선포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 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강도의 소굴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에 화가 내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모습은 오늘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저도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종교적 열심만으론 충분치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당연히 그 행동과 삶도 하나님 믿는 사람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합니다.

경제 정의는 아모스서와 미가서에서도 중요한 메시지였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도 돌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 을 사랑한다고 말하냐?”는 것이지요.

제 말이 아니라, 삶과 행동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지….

삶과 행동이 하나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지….

 

II.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라.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분명 범죄한 이스라엘을 심판하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스바냐서 전체에 걸쳐 심판이 분명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죽이는 데 있지 않고, 살리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생명을 멸하는 데 있지 않고, 어쩌든지 살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너희에게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도 구원을 베풀고 살리려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이잖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요한복음 3장 16절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영생과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는 구절이 3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어찌해서든지 우리가 심판받지 않고, 멸망 받지 않고, 구원 받고 영생 얻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할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17절에서 보면, 용서받은 사람들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아니,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기쁨은 평범한 기쁨이 아니라, 최고의 기쁨, 환희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볼 때, 그렇게 최고로 기뻐하시고,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할 정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구원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기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황송하고, 감격스러운지요. 

 

3. 하나님은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때에 “너를 잠잠히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잠잠하다”는 것은 침묵한다, 조용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데, 요란스럽게 사랑하시는 모습이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서 변치 않고, 꾸준하게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확정되었습 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하는 립서비스가 아니었습니다.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이었습니다.


오늘 스바냐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를 구원하시려 어떻게 하셨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를 살리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살릴 수만 있다면, 목숨을 바치는 것도 아깝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 사랑이 파도처럼 몰려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주님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오늘 저도 제 삶을 바쳐 주님을 사랑하며 살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들려고 애쓰며 살기 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nnZfGw2doc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