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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09/27/23 슥 9-10장 “9장 겸손한 왕” Publish on September 27,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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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43회 작성일 23-09-27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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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슥 9장을 묵상하겠습니다.

 

스가랴서는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던 시기에 선포된 예언이잖아요?

학개 선지자가 직접 성전재건을 시작하자고 사람들을 독려했다면, 스가랴 선지자는 “조금 더 힘내서 성전을 완공하자. 성전이 이렇게 영적으로 의미 깊은 곳이다.”라는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오늘부터 살펴보는 후반부(9-14장)는 엄중한 말씀(9-11장)과 경고의 말씀(12~14장)으로 구분됩니다.

(그냥 간단히 첫 번째 경고, 두 번째 경고라고 보셔도 됩니다.)

그런데 그 경고의 말씀 가운데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이 많이 나옵니다. 

메시야의 초림뿐 아니라, 재림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성전 건축 메시지 뒤에 메시아가 예언되는 것은 “메시아가 성전되신다”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읽는 엄중한 말씀(9-11장) 중에서 9장에 나오는 메시아 예언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9장 앞부분(1~8절)에는 이스라엘 주변의 여러 나라가 나옵니다. 

다들 힘 있는 나라들입니다. 

요새를 건축하였고, 은금을 잔뜩 쌓아 놓았습니다.  

그런 나라에는 강력한 군주들이 있지요.

고대시대에 왕의 권력은 백성들을 압제하거나, 외국을 침략해서 부를 빼앗음으로 이룩하는 것이었습니다.

포악과 압제를 통해 왕의 권위를 세우고,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런데 9:9에서 시온의 딸(예루살렘 거민)들에게 크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오시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왕은 독특한 왕입니다.

이 왕이 어떤 왕이냐 하면요.


1. 겸손한 왕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당시 이스라엘에선 장군은 말을 탔고, 왕은 노새를 탔습니다. 

(서양 동화책에는 왕이 백마를 타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의 전통을 따라 노새를 탔습니다.)

그런데 9절에 나오는 왕은 나귀 새끼를 탑니다.

나귀는 모양도 못생겼고, 크기도 작습니다. 

주로 백성들이 짐을 싣는 용도로 썼습니다.

그런 나귀를, 나귀 중에서도 작은 새끼 나귀를 탄다는 것은 왕의 위엄을 나타내기에 전혀 적합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왕은 겸손한 왕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낮은 백성들의 눈높이를 맞춰주시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에서 인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벳바게(감람산 동편 기슭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 제자들을 보내셔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 하셨습니다.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마 21장).


예언대로, 주님은 낮은 자로 이 땅에 오셨고, 겸손한 자로 사역하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도 겸손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요즘은 자기 피알(Public Relation, 홍보) 시대입니다.

회사에 입사할 때, 자기소개서를 잘 써야 합니다.

연봉 협상할 때도, 자기의 장점과 실적을 잘 어필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은근히 자기를 드러내고 높이는 일을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겸손의 왕이셨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왕이셨습니다.


저는 어떤 모습인지 돌아봅니다.

과연 저는 저를 낮추는지, 섬기는 자리로 즐겨 가는지….

제 속에도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즐기는 모습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며, 제 마음을 다시 설득합니다.

주님 닮기를, 주님 따르기를 원한다면, 겸손의 왕의 모습을 닮아가고 따라가야 한다고.


II. 평화의 왕

“(슥 9: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이때는 포로귀환 시대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미 BC 722에 망하고 없습니다.

남유다도 BC 586에 망했다가 이제 겨우 포로에서 귀환했습니다.

그러니, 10절은 스가랴 당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이 없는데, “에브라임의 병거를 끊고, 예루살렘의 말을 끊고, 활도 끊겠다”고 하는 것은 과거 분열 왕국 시대에 서로 갈등하고 전쟁하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전에 사람 왕이 통치할 때는 너희가 서로 갈등하고 다투었지만, 이제 메시아가 오셔서 통치하게 되면 모두가 평화롭게 지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평화는 그동안 세상이 경험치 못했던 진짜 평화, 참 평화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셔서 이뤄질 평화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사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 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 11: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주님은 평화의 왕이셨고, 평화의 통로였습니다.

메시아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평화를 시작하셨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을 우리를 화평하게 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평화는 재림하실 때 완성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이사야가 바라본 샬롬의 환상이 현실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 제가 어떻게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할지 생각해 봅니다.

프란시스의 기도문이 떠오릅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한 주여,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iKRshWN7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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