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23 마 8-10장, “9장 소녀가 살아나다” > 묵상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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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10/03/23 마 8-10장, “9장 소녀가 살아나다” Publish on October 03,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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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6회 작성일 23-10-03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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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마태복음 9장을 묵상하려 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인 세리 마태(레위)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주로 왕이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족보(혈통)을 소개하고, 왕으로서 새로운 법령(산상 수훈 )을 선포하고, 자연(풍랑 등)이나 인간의 연약함(병, 귀신들림 등) 조차 지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천국(하나님 나라의 왕이 통치하는 곳) 비유나 종말(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시는 때) 비유도 예수님을 왕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이야기가 하나로 엮여져 있는,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앞뒤로 야이로의 딸 이야기가 나오고, 중간에 혈루증 앓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공관복음에서 세 번(마9, 막 5, 눅 8장)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공관복음이 세권인데, 세 번 다 나온다니, 그만큼 중요하단 말이지요.

세 이야기는 약간씩 강조점이 다릅니다.

‘(마 9: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야이로가 딸이 죽어간다고 했는데요. 

반면에, 마태복음에서는 내 딸이 방금 죽었지만,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면 살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긴급하고, 시급한 상황인 것이 확연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속이 타고 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1. 회당장

마태복음은 이 아버지가 한 관리라고만 합니다. 

이 사람의 신분에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다급함과 믿음, 소망 등에 집중합니다.


참고로,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을 보면, 이 사람이 회당장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당장은 회당을 관리하는 총책임자입니다. 

당시 회당은 성경공부의 장소일 뿐 아니라, 교제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회당은 이런 저런 소문이 오고가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당시에 새로 나타난 예수님의 권세 있는 치유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회당장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자신의 딸이 낫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2. 이 관리(회당장 야이로)는 왜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았을까요?

그동안 딸의 아픔을 보면서도 무엇 때문에 주저했을까요?

당시 예수님은 유대지도자들에게 위험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지도계층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적 전통을 깨는 것도 그렇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도 그렇고, 여러모로 사람 들의 눈이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마치 니고데모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예수님을 만나러 갔던 것과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밤에 몰래 라도 만나러 갔지만, 회당장은 예수님을 만나러 가지 못했습 니다.

저도 작은 것을 지키기 위해 큰 것을 놓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혹시 지금도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이 없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3. 그런데 야이로가 덜 중요한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예수님께 나아가게 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요?

딸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아니, 딸이 방금 죽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눈치 볼 상황이 아니었고, 망설일 시간도 없었습니다. 

이제야 회당장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죽음이라는 위기가 회당장이 정말 중요한 것에 눈을 뜨게 했습니다. 

야이로는 자신의 지위와 체면을 포기할 각오를 하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어려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싫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회당장에게도 어려움은 변장한 축복이었습니다.

이 어려움이 아니었으면, 예수님께 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어려움 때문에 예수님께 나갈 수 있었습니다. 

제게 어려움이 닥칠 때도 그것을 예수님께 나가는 기회와 통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과 태도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3. 예수님이 움직이심

“(마 9: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야이로가 간절한 믿음을 보여드릴 때, 예수님이 움직이셨습니다. 

맞습니다.

오늘 제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보여드리면, 성령께서 역사하기 시작하십니다. 

저에게 위기가 찾아올 때, 그 위기를 저의 믿음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겠습니다. 

제가 믿음만 드러내면, 하나님이 움직여 주실 줄 믿습니다.


4. 혈루병 여인과 소녀

예수님이 관리의 집에 들어갔을 때, 소녀는 이미 죽어 있었고, 장례식이 준비되고 있었습 니다.

오시는 길에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쳐주셨는데, 그사이에 이미 소녀는 죽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혈루병 여인에게 지체하지 않고 오셨다면, 아이가 살았을까요?

혹시 예수님이 더 급한 것과 눈앞의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실수하신 걸까요?

아니요. 실수하신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이야기와 혈루병 여인이 고침 받는 이야기가 샌드위치 구조처럼 되어있다고 했는데요.

혈루병 여인이 고침 받는 이야기는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는 이야기를 더욱 부각시키고, 그 의미를 밝히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혈루병 여인이야기가 어떻게 야이로의 딸이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냐 하면요. 

혈루병 여인은 생물학적으론 아직 죽지 않았지만, 사회적/정신적으로는 죽은 목숨이었습 니다.

혈루병은 접촉한 사람도 부정하게 만드는 병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아무도 가까이 올수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격리됩니다.

사회적인 의미에서 죽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오랫동안 병자 취급에,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으니, 감정적으로도 우울해지고, 죽어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서 되살아났습니다.

되살아난 것은 단지 육체의 건강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영혼도, 감정도, 사회적 관계도, 다 되살아났습니다.

혈루병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를 영적, 감정적, 사회적 죽음에서 되살리십니다.


그리고 야이로의 딸에게 가십니다.

그녀는 이미 육체적으로 죽어있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녀를 육체적인 죽음에서 되살리셨습니다. 


5. 소녀를 일으키심

소녀는 완전히 죽었고, 싸늘한 시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소녀를 위해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소녀를 살렸습니다. 

“(마 9: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누가복음은 “달리다 굼 (소녀야, 일어나라)”하셨다고, 당시 상황을 더 자세히 기록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이야기를 단순하게 소개하는 대신, 소녀가 “일어났다”는 것에 집중합 니다.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부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일이 가능케 될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딸의 죽음 앞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앞에 나아왔던 아버지의 믿음때문이었습니다.

(혈루병 여인 경우에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9:22).)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믿음은 믿음 하나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소망과 사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딸에 대한 사랑과 치유에 대한 소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딸을 위해 자신이 누리는 모든 명성을 버릴 수 있는 사랑과 예수님은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과 딸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 이 딸을 살렸습니다.


저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저도 사랑과 소망과 연결된 믿음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도 어려움과 위기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이겨나가는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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