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8/23 마 21~23장, “21장 예루살렘 입성” > 묵상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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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10/08/23 마 21~23장, “21장 예루살렘 입성” Publish on October 11,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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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7회 작성일 23-10-11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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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마 21장을 묵상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입니다.

이때는 유월절 직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중요한 절기 때엔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각지와 타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면 성안에 갑자기 인구가 집중되어서, 다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 동편 감람산 기슭에 임시텐트촌을 형성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은 갈릴리에서 활동하셨던 나사렛 예수의 소문을 익히 듣고 보았습 니다.

또, 베다니를 거쳐서 온 사람들은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 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놀라움과 설렘으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I. “(마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사람들은 참으로 엄청나게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1) 사람들은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외쳤고, 나뭇가지도 흔들었습니다.

요한복음은 특별히 종려(올리브)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합니다(요 12:13). 

당시에 종려나무는 승리와 환호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150년 전에 ‘마카비’라는 독립투사가 당시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던 셀류커스 제국(시리아)을 몰아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종려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그렇게 승리의 개선장군을 맞이하듯이 예수님을 환영하며 환호했습니다.


2)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호산”은 구원한다(save)는 말이고, “나”는 지금(now), 제발(please)이란 말입니다.

호산나는 “지금/제발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시편 118편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또,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스가랴서에서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시편에서는 메시아를 이스라엘의 왕이라 불렀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이 메시야적인 왕이란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혁명적인 말입니다. 

“이제 겨우 3년째 이름이 알려진 청년 선지자가 메시아라니요, 로마 식민지인데 왕이라 니요.” 


왜 그렇게 불렀을까요?

첫째, 이 외침은 군중들이 왜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하고, 기대했는지 바로 보여주고 있습 니다. 

바벨론에 남유다가 망한 뒤로, 수백 년간 외국의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프톨레미, 셀루커스 등 나라는 바뀌어도, 지배받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잠시 헤스몬 왕국을 세운적도 있었지만, 다시 로마와 헤롯의 이중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더욱 간절하게 메시아를 원했고, 자기들을 구해줄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 기대하고 간절하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군중들이 예수님을 환영했던 그 열광적인 모습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던 그 모습은 참으로 부럽습니다. 

성경을 읽노라면 그들이 지르는 함성이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장로교회는 너무 점잖고, 이성적입니다. 

꿈쩍 않는 바위 같습니다. 

물론 신앙이 요동 없이 안정적인 것은 참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렇게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환호하는 모습, 감성적인 모습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II.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왕으로 환호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평생 걸어 다니셨습니다. 

공생애 전에도 그랬고, 공생애 3년 동안에도 거의 걸어 다녔습니다. 

그런데 유독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뭔가 타고 들어가겠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런데 멋진 가마나, 말이 아니라, 나귀, 그것도 새끼나귀를 타고 들어갑니다. 

어떤 의도가 있을까요?

이것은 구약 성경 스가랴서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 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스라엘의 왕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성경 구절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좀 모순된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보통 외국의 왕들은 크고 찬란한 치장을 한 군마를 탑니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다윗의 전통을 따라 노새를 탔습니다. 

그런데 스가랴에 나오는 왕은 겸손하여서 겨우 나귀 새끼를 탄다고 합니다. 

마치 시골 농부 같은 소박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이런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먼저 낮아져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낮아짐과 섬김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기독교의 힘은 세상의 방식과 다릅니다. 

돈과 권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아지고 섬김으로 리더십이 생깁니다. 


저의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봅니다.

저의 필요를 채워주실 예수님을 기대하며 환호하는 것은 아닌지….

저도 나귀 타신 예수님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낮아지고 겸손하고 순종하시다가 영광 받으셨습니다. 

저도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섬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섬기고 순종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제 생각을 멀리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을 향해 열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omwreCPQ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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