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0/23 행 24~26장, “25장 가이사에게 상소” > 묵상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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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11/10/23 행 24~26장, “25장 가이사에게 상소” Publish on November 10,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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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63회 작성일 23-11-10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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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행 25장을 묵상하겠습니다. 


그동안 바울은 세 차례에 걸쳐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로마로 가는 과정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바울 외에 3명이 더 등장합니다.


1) 체포될 때 총독은 벨릭스였습니다.

벨릭스는 대략 AD 52년부터 55년까지 유대의 총독이었습니다. 

원래 노예였는데 자유민이 되었고, 총독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 유부녀였던 드루실라(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를 유혹해서 이혼시키고, 자기와 재혼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벨릭스와 드루실라 앞에서 담대하게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설교했습니다(행 24). 

당시에 벨릭스는 뇌물을 받으면, 반역자까지도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뇌물을 바랬고, 거의 2년이나 잡아두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욕심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대인의 폭동을 너무 잔혹하게 진압하는 바람에 로마로 소환됩니다. 

결국, 총독에서 교체되었습니다.


2) 지금 바울을 재판하고 있는 총독은 베스도입니다. 

AD 55~57년에 유대 총독이었습니다. 

벨릭스가 악행을 저지른 바로 뒤에 부임했기 때문에, 유대인과 협조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자기가 볼 때는 바울이 무죄였지만, 유대인들의 눈치 때문에, 무죄를 선고하지 못했습니 다. 

결국, 로마 황제의 법정으로 바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간적으로 노력했지만, 그도 2년밖에 총독 자리를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노력해도 되는 게 아닙니다.) 


3) 바울 때의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바울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겉으로 볼 때, 명분은 그럴싸합니다.

종교적인 문제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의회에서 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심은 예루살렘에 가는 길에 암살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이 일이 뜻대로 안 되자, 총독 앞에서 또다시 재판하면서 억지 주장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바울을 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들의 음모가 실현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한다고 요청한 것입니다. 

황제에게 상소함으로써 일석이조가 됩니다.

* 유대인들은 닭 쫓던 개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 바울은 암살 음모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려는 비전도 실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장면을 중심으로 묵상해 보겠습니다.

“(행 25: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 한대”


1. 여기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잡한 정치적 관계와 갈등과 음모조차도 모두 합력해서 바울이 로마로 가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오기 전에 이미 바울은 성령에 감동되어서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비전을 품었는데요. 

지금 그 비전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비전을 현실화시키실 때, 수많은 사람과 상황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실 때, 수많은 사람과 상황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나쁜 사람들과 음모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과정을 막을 수 없습니다.

어떤 짓을 해도, 하나님은 결국 그 뜻을 이루십니다.

유대인이, 로마인이 어떤 짓을 해도 바울은 결국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죄인의 신분이 되지만,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고위층 사람들과 군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을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로마 감옥에서 쓴 옥중 서신들은 초대교회를 세워가는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제 인생을 인도하실 때도 이렇게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못 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 어떤 위험이나 어려움에도 하나님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과 상황과 관계들을 사용하셔서 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해 주십 니다.

오늘도 주님이 저의 상황 속에 들어오셔서 역사하실 것을 바라봅니다. 

“주님, 저의 상황과 형편 속에 임재하소서. 

주님의 뜻을 이뤄주시고, 저를 인도해 주소서.” 


2.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바울이 왜 가이사에게 상소합니까?

공정한 재판을 받기 위해서일까요?

아니지요.

로마에서 복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 복음화를 위한 비전 때문입니다. 

로마를 보기 위해서 상소하는 것입니다. 

로마를 보기 위해서 죄수의 신분도 마다치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날도, 그 순간도, 복음과 비전을 성취하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습 니다. 


여기에 저의 인생을 비춰봅니다.

저도 비전을 향해 달려가기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꿈을 향해 달려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향해 달려갈 때, 일석이조가 이뤄지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 복음화를 위해 나아갔는데, 결국 암살 음모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할 때, 다른 모든 것도 형통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3. 그러나 죄수로서 로마까지 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바울이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을까요?

“(행 25: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본문은 “만약 내가 죄를 지었다면, 죽음의 벌이라도 받겠다”라는 문맥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바울의 본심이 묻어 있습니다.

바울의 본심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죽기를 사양치 않겠다”라는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에스더의 신앙고백을 생각나게 합니다.

실제로 수많은 성도가 죽음을 맞서며 신앙 생활했고, 그들의 용기와 피와 땀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자세는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보여줍니다.

말씀은 오늘 저에게도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노라는 각오로 살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순교하진 못할 수 있습니다. 

(아니, 순교할 확률은 아주 낮지요.)

그러나 매일 저의 옛 자아를 죽일 수는 있습니다. 

저는 매일 옛사람과 새사람이 제 속에서 싸우는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오늘도 저의 옛 자아를 죽이고, 저의 옛 성질을 죽이고, 저의 옛 욕심을 죽이며 살아야겠 습니다.


또한, 저는 죽도록 충성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에게 또 하루의 시간이 또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하루를 제게 주셨으니, 오늘도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주를 위해 내 목숨까지라도 아끼지 않겠다는 자세로 살기를 원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려 살기를 소원합니다. 

“충성은 열매 가운데 하나요…” 하시던 최춘선 할아버지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자꾸 눈에 물이 맺힙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_Rbc8qIg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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