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5/23 롬 9-11장, “11장 유대인과 이방인” > 묵상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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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11/15/23 롬 9-11장, “11장 유대인과 이방인” Publish on November 15,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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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8회 작성일 23-11-15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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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롬 11장을 묵상하겠습니다.


로마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1-11장은 교리, 12-16장은 실천으로 나눌 수 있습 니다.

11장은 교리 부분 마지막 내용입니다.

11장을 묵상하기 위해, 로마서의 배경과 문맥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아니라, 이름 없는 성도들이 만든 자생적 교회였습니다.

유대인 교포들이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후에, 로마로 돌아와 교회를 세웠습니다.

처음엔 유대인 교회였지만, 이방 지역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공존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4대 황제인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 AD 41-54 통치)가 45년에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습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고린도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함께 동역했는데, 이들도 로마에서 추방된 성도였습니다(행 18장).

자연히 로마교회는 유대인 성도들이 없어지고, 이방인 성도들만 남은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글라우디오 사후(AD 54)에 그 명령이 철회되어,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시기는 AD 57년경이라고 추측됩니다. 

3차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 사역을 마치고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니, 이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로마교회로 모여 들고 있었습니다.

로마교회는 다시 유대인과 이방인이 공존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두 그룹의 공존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다인종 교회가 어려운데, 당시는 얼마나 더 어려웠겠습니까?

특히 전통과 율법은 둘의 차이를 더 크게 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로마교회에 편지한 것입니다. 

그는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라고 설명합니다.

율법의 행위와 업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Justification).

이것은 그동안 율법을 삶의 중심으로 삼았던 유대인들의 입장에선 충격적인 주장입니다.

바울이 이방인 편을 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문맥에서 11장이 이어집니다.

“(롬 11:1-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 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11장에서 바울은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단 말이냐(11:1)?” 

“유대인들이 걸려 넘어져서, 완전히 쓰러졌고, 망하게끔 되었느냐(11:11)?”

과연 하나님은 구약에서 선택하셨던 유대인을 버린 것일까요?


바울은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라 합니다.

바울이 계속 말하는 바를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하시는 법이 없다 합니다(롬 11:29).

유대인을 부르신 것도 잘못 부르신 것이 아니요, 불렀는데 쓸모없다고 후회하시지도 않고, 버리시지도 않으신다고 합니다. 


물론, 초기에 유대인들이 불순종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 니다(11:30).

그래서 마치 농사지을 때 참 감람나무(올리브 나무, Olive tree)에 돌 감람 가지(야생 올리브 나무, wild olive shoot)를 접붙여서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게 하는 것처럼, 이방인과 유대인이 복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11:17).

생각해 보면,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전도의 문을 열고 난 후,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서 선교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까지는 예수 믿는 이방인이 없었지만, 30년 후에는 교회에 이방인들로 가득 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방인들에게 임한 긍휼로 이제는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게 된다고 말합 니다. 

처음에는 이방인이 우둔하고 불순종했지만, 뒤에는 유대인이 우둔하고 불순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불순종조차도 사용하셔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 셨습니다(11:32).

그래서 바울은 “(롬 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둘은 생각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주장하는 바도 다르지만, 하나님은 복음 안에서 둘 다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 품고 계십니다. 

둘 다 사랑하시고, 둘 다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땅의 창조주이십니다.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해 돌아가셨고, 모두를 구원하셨습니다. 

바울도 이방인들을 선교하는 사도로 살았지만, 동족 구원에도 누구 못지않게 열정과 열심을 내었습니다. 

“나의 형제, 골육 친척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나 자신은 저주받아 죽어도 좋다, 그리 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이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롬 9:3).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지만, 유대인들도 구원하기 원했습니다. 

즉, 온 세계를 구원하기 원했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한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우둔함도 사용하시고, 유대인의 불순종조차도 사용하셔서,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인생과 미래를 위해서는 어떻게 역사하실지 궁금해집니다.

하나님의 신비가 기대됩니다.

주여,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신비함으로 제게 역사하소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저는 복음 안에서 차별이 없는가?

저는 예수님께 차별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저를 이방인이라고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사람을 저의 잣대로 나누고, 차별하고, 구별하진 않는지 생각해 봅니다.

혹시 “나는 단일문화에서 자라서, 몸에 배어서 어쩔 수가 없어.”라고 정당화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봅니다.

부자, 권력자, 나에게 이득 되는 사람이라고 더 가까이 대하고, 아닌 사람들은 더 소홀히 대하진 않는지 돌아봅니다.

모든 사람을 주님 안에서 품고, 하나같이 대하고, 동일하게 귀하게 여기고, 동일하게 사랑하며 섬겨야겠다고 다시 다짐합니다.


3. 제게 이방인 구원과 동족 구원에 대한 열정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주님은 이 땅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선교사로 오셨는데, 저는 무엇 하고 있는지 돌아봅 니다.

지금 당장 지리적인 땅끝으로는 가지 못해도, 제 옆에 있는 땅끝, 문화적 땅끝, 감정적인 땅끝에는 언제든지 갈 수 있는데….

저도 주님의 마음을 품고, 선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8uPJG2xe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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