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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11/18/23 고전 1~3장, “1장 십자가의 도” Publish on November 18,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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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9회 작성일 23-11-18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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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고전 1장을 묵상하겠습니다.


I. 배경 설명

고린도 전서를 쓰게 된 배경을 알면, 읽는데 도움이 됩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남부지역인 아가야의 수도입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남부지역인 아가야 지역의 중심도시였습니다.

당시 인구가 6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지역이었기에, 무역이 발달했습니다.

더구나 스토아 학파 같은 철학자들이 수사학과 웅변학을 학문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었습 니다.

그러나 이곳은 향락과 타락의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아프로디테 (미의 여신)를 섬기는 신전에 1000명 이상의 여 사제들이 문란한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어에서도 corinthianize는 성적으로 문란하게 산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런 도시에 바울이 선교하러 왔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처음 방문한 것은 2차 선교 여행 때 이었습니다.

이곳에서 1년 6개월간 머물면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습니다(행 18장).

고린도 교회는 언변과 지식이 풍부했고, 은사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성장하던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에 바울은 3차 선교 여행 중이었고, 에베소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고린도 교회 대표단(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이 바울을 찾아와서, 고린도 교회 문제들에 대해 자문을 요청했습니다(고전 16:17).

당장 에베소를 떠날 수 없었던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고린도 전서입니다.   

(물론, 편지를 보낸 후에도 계속 고린도 교회 문제와 씨름했고, 직접 방문하기도 하고, 디도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문제가 해결된 후에 보낸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II. 1장: 십자가의 관점

저는 안경을 끼고 있습니다.

노안이 처음 생겼을 땐, 안경을 썼다 벗었다 했는데요.

요즘은 다초점 렌즈를 쓰면서 굉장히 편해졌습니다.

먼 것도 잘 보이고, 가까운 것도 잘 보입니다. 

제가 왜 안경 얘기를 하냐 하면요.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에 대해, 우리의 시각과 관점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도 제대로 보고, 판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풍족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문제들도 많았습니다. 

그 문제들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갈등이 생기고 서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편지를 썼는데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첫 번째로 제시하는 해답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도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는 단순히 십자가에 대한 메시지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정신과 삶의 실천까지 다 포함하는 넓은 의미입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시각이나 관점, 세계관, 가치관, 삶의 방식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 해결하는 방법은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 “도”를 “방식”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전 1:18, 메시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메시지가 멸망하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강력한 방식임이 입증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십자가의 관점, 십자가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요점은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생긴 것은 그들이 십자가의 도를 잊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 십자가의 관점, 십자가를 따르는 삶의 방식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 다. 

십자가라는 안경(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의 핵심인 십자가의 도에 대해 다시 설명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점에 집중합니다.

누가 미련한 자이고, 누가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입니까? 

무엇이 거리끼는 것이고, 무엇이 자랑거리입니까? 

당시에 유대인과 헬라인들은 표적과 지식을 자랑했습니다.

전도나 십자가 같은 것들은 미련한 것이고, 거리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알고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십자가가 하나님의 비밀 병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관점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바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고린도 교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날 미국은 최첨단 과학이 모여 있는 곳이고, 엄청난 부가 집중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물질문명의 안경과 첨단 과학의 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땅 한복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라는 안경을 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라는 안경을 끼고 보는 것과 벗고 보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우리가 십자가 밖에서 바라보는 것과 십자가 안에서 바라보는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자기를 바라보면, 자기의 죄와 허물이 보이고, 구변과 지식과 은사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십자가 밖에서 바라보면, 세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자기 허물은 안 보이고 자기의 의만 보입니다. 

자기의 은사와 구변과 지식도 자신의 자랑이 됩니다.

자기 허물은 못 보고, 타인의 허물만 보입니다. 

나는 높아 보이고, 남들은 낮아 보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다 보면, 답답한 상황을 만날 수도 있고, 답답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 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추구했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표적이나 지혜가 우리가 당면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줄까요?

아닙니다. 

세상적인 관점과 방식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오직 십자가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십자가의 방식을 추구하고 십자가를 따라갈 때,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습니다.


세상적으로 생각하면, 십자가의 방식이 지혜롭지 못하고, 미련해 보이고, 바보스러워 보이고, 무능력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가장 능력 있는 방식이고, 가장 지혜로운 방식입니다.

전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를 누가 복음화 시켰습니까? 

진실하게 십자가를 따르던 노예들과 힘없는 하층민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힘과 능력입니다.


저도 오늘을 살면서, 여러 가지 상황을 만나고, 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고, 많은 대화도 나눌 것입니다.

그때, 저도 십자가의 도를 생각하기 원합니다.

사람들과 얘기할 때, 십자가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문제를 만날 때, 십자가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십자가의 길을 추구하면 살려고 노력하기 원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바라보며 살고, 십자가 중심으로 생각하며 살고, 그 십자가를 따라가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ZBpciduxo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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