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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12/27/23 계 7~9장, “7장 십사만 사천” Publish on December 28,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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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4회 작성일 23-12-28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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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성도 여러분,  

오늘은 계 7장을 묵상하겠습니다.


이단들은 계시록에서 7인, 7나팔, 7대접 같은 환상들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666(짐승의 표)은 그들의 단골 메뉴입니다. 

또한, 십사만 사천의 무리도 자기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은 성경은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7장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의 무리에 대해 묵상하겠습니다.

(7장의 내용이 매우 깊고, 풍성합니다. 

신구약 곳곳에 있는 이미지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주제만으로도 하루 묵상 분량이 충분합니다.

그러나 풍성한 주제들을 조금씩이나마 맛보고 싶어서, 짧게 다양한 주제에 접근하면서 묵상하려 합니다.)


1. 하나님의 인

“(계 7:3)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7장에는 천사에게 인 맞은 자가 나오고, 13장에 가면 짐승의 표(666)가 나옵니다.

두 표의 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표가 먼저 나오고, 나중에 짐승의 표가 나옵니다.


1) 마치, 출애굽 당시 마지막 재앙 직전에 피의 표식은 중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자 재앙의 밤에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발랐습니다.

하나님이 장자들을 치실 때,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구원받았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그 집은 넘어갔었습니다.


2) 에스겔 환상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겔 9: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을 심판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의 죄악을 탄식하며 우는 자들에게는 미리 이마에 표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심판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말세의 환난이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견디고 이길 길을 미리 준비해 주십니다. 


2. 십사만 사천

십사만 사천의 군중은 종려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며 찬양합니다.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 종려 가지를 흔드는 모습은 레위기에서 초막절을 지키는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레 23:40)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 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초막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40년간 지키고 보호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또한, 신약에서는 주님이 종말에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2) 또한, 종려 가지를 흔드는 모습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

승리하신 주님, 온 우주의 왕이요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신 주님을 기뻐하며 환호하는 모습입니다.


3. 이 무리는 인종을 초월한 다민족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유대인만 선택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나라와 족속과 방언을 초월한 다민족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또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임을 보여줍니다.

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는 실제 숫자라가 보다는, 이 숫자가 상징하는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십사만 사천이 12지파(구약) x12제자(신약) x1000(거대한 숫자)의 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신구약을 통틀어서, 인종과 지역을 초월하는 거대한 무리란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땅 끝까지 전해진 복음을 믿은 무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들은 땅 끝까지 복음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일꾼들을 통해 예수님 믿은 무리입니다. 

전도와 선교가 단지 교인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역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도 십사만 사천의 비전을 바라보며, 나라와 족속과 방언을 초월해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에 힘을 내야겠습니다.


4. 큰 무리의 찬양

“(계 7:10) 큰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 이 무리는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고 외칩니다.

예전에 다윗도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는 상황에서도,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시 3:8).”라고 찬양했었습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단지 위기에서 구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2) 구약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날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이지만, 대적들에는 무시무시한 심판의 날이 될 것을 여러 번 예언했습니다.

이제 신약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그런 날이 될 것입니다.

재림하실 때에 대적들을 순식간에 물리쳐버릴 것입니다.

칼로 모든 민족을 치고,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릴 때, 대적자들은 다 쳐 죽이고, 불 못에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계 19장).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완전한 회복이 이뤄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 회복은 임마누엘을 통해 이뤄집니다.


5. 장막을 치심

“(계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 장막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해 주시며, 함께 해 주신다는 표현입니다. 

즉 임마누엘입니다.

원래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시고 동행하시는 것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레위기에서 성막에 대한 규례를 주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레 26:11)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레 26: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

성막은 하나님이 우리를 싫어하지 않는다, 즉 아끼고 사랑하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를 백성 삼으시는 장소입니다. 


3) 장막을 치신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란 구절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거하시매는 “천막을 치다, 천막 안에 거하다(to pitch or live in a tent)”라는 뜻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것이 ‘이 땅에 성막을 치신 사건’이라고 설명했습니다(요 1장).

그리고 이제 종말에 다시 오실 때도 ‘이 땅에 장막을 치실 것’이라고, 즉 ‘성막을 치실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계 7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살았잖아요.

광야에서 하나님이 안전하게 지키시고, 풍성하게 공급하시고, 불기둥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체험하면서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서도 주님이 백성들에게 성막을 치시고, 또한 성막이 되셔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 환상에서 요한이 구경한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성전 되시기 때문에, 별도의 성전 건물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계 21:22).


6. 부족함이 없는 곳 

1) 천국에서 주님이 백성들에게 성막을 치시면 어떻게 될까요?

천국의 장막에서 주님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부족한 것 천지입니다. 


2) 특히, 1세기 당시에 로마의 핍박을 피해 이리저리 유리방황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땅은 부족한 것 천지였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또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히 11:37-38).

그러니, 당연히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부족했고, 낮에는 더워 죽을 것 같고, 밤에는 추워 죽을 것 같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하는 그곳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고, 목마르지 아니하고, 뜨거운 기운에 상치도 않는 곳(7:16)”입니다. 


3) 마치 양들이 목자의 보호 아래 있으면, 부족함이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시편 23편을 참 좋아합니다.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의 생명과 행복은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의 백성들도 목자 되신 예수님에 의해 생명수 샘으로 인도됩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수고하고 목말랐던 영혼을 그 샘으로 인도하여 목을 축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7. 눈물을 씻어 주시는 곳 

우리 인생은 눈물의 인생입니다. 

시 80편은 인생들이 눈물 양식을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시 84편에 보면 눈물 골짜기를 통과한다고 했습니다.

저도 인생을 살면서 눈물 흘린 기억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갈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계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 '눈물과 사망, 애통, 아픔'은 죄악 된 세상에서 예수님 믿고, 교회를 섬기느라 생긴 것들입니다. 

우리가 처음 천국에 올라갈 때, 이 상처들과 눈물 자국들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럼, 그 자국을 보시고, 주님은 우리를 생명 샘가로 데려가십니다.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등을 토닥거리시며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그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생명수 샘가에서 주님은 성도들의 눈의 눈물을 씻어 주신다는 것은 모든 아픔과 고통을 치료하시고 위로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신앙과 믿음 때문에 겪은 모든 슬픔과 괴로움을 완전히 종결시켜주시고,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과 충만한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제 눈의 눈물도 씻어 주실 그날을 소망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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