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8/23 계 10~13장, “11장 성전과 두 증인” > 묵상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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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편지

12/28/23 계 10~13장, “11장 성전과 두 증인” Publish on December 28,2023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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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4회 작성일 23-12-28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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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PC 식구 여러분,  

오늘은 계 11장을 묵상하겠습니다.


계시록 6장~16장은 7인과 7나팔, 7대접의 환상이 나오는 장면입니다.

계시록에서 가장 어두운 부분입니다.

또한, 해석이 분분한 장면이기도 하지요.

이런 영향 때문인지, 많은 분이 계시록을 읽으면서 환난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환난 중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계시록을 천상과 지상으로 구분하면서, 천상의 모습에 더 비중을 두고 읽습니다.

마치 드라마에서 앞집과 뒷집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는 것처럼, 계시록의 환상은 지상과 천상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줍니다. 

지상에서 극심한 환난이 있지만, 그것이 천상의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한, 지상의 핍박과 상관없이, 천상의 영광은 한없이 빛납니다.

그 천상의 모습은 지상에서 고난 받는 성도들이 가지는 소망과 위로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계시록을 읽는 방식에는 몇 가지가 더 있는데요. 각각의 방식들은 계시록의 풍성한 의미를 더 잘 알도록 도와줍니다.

1) 예수님 중심으로 읽기

모든 성경이 그렇듯이, 계시록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입니다.

계시록에는 예수님을 표현하는 단어들, 상징들이 특히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표현하는 것이 28번이나 나옵니다.

그 외에도 대제사장, 교회의 양육자, 창조주, 심판주, 정복자 등 다양한 이미지가 나옵니다.

계시록을 읽으면서, 이런 이미지의 흐름을 추적하는 것도 좋습니다.


2) 성소 구조 중심으로 읽기

계시록은 장면마다 성소(성전, 성막)의 구조가 자주 언급됩니다.

일곱 금 촛대(1:12), 제단(6:9), 금 제단(8:3), 언약궤(11:19), 유리 바다(계 4:6, 15:2) 등이 장면마다 언급이 됩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읽으면서, 성막의 구조를 생각하며 읽으면, 또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2) 대칭 구조(Chiastic Structure) 중심으로 읽기

성경은 대칭 구조가 자주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편입니다.

계시록도 1장과 22장의 대칭 구조나, 창세기와 계시록의 대칭 구조도 공부해보면 좋습니다.

계시록 전체를 대칭 구조로 구분한다면, 사탄이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장면(11:19~13:18)을 중심으로, 그 전과 그 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묵상할 11장에는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두 개의 환상이 나옵니다.

10장 마지막에는 요한이 두루마리를 먹고, 선교의 사명을 받는 첫 번째 환상이 나오고요.

11장에는 성전과 두 증인이 등장하는 두 번째 환상이 나옵니다.

(이런 환상들은 신학적 입장에 따라 해석이 엄청 다양합니다.

그래서 저와 다르게 해석/적용하는 분들도 있을 수도 있음을 이해해 주세요.)


1. 성전 환상

(계 11: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계 11: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요한이 새로운 선교 사명을 받은 후에(10장 끝부분), 하나님은 갈대 지팡이로 성전을 측량하라고 하십니다.

측량하는데, 성전 안만 측량하고, 성전 바깥마당은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바깥마당은 42개월(삼 년 반) 동안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게 될 것입니다.

성전 밖은 짓밟히게 둔다는 것은 다섯째 나팔을 불 때,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고 하셨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계 9:4). 


성전 밖은 짓밟히도록 허용하시겠지만,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는 측량하라 하셨잖아요?

이것은 “성전 안은 지키고 보호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측량은 주로 소유권을 주장하려고 할 때 합니다. 

하나님은 측량한 영역에 대해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보호하시기 위해 측량하신 것입니다.


이 성전이 문자적 성전은 아닙니다.

신약에서 성전은 예수님의 몸이나(요 2:21; 계 21:22), 성도들이나(고전 3:16-17; 6:19), 교회를(엡 2:21-22)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성전도 교회나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즉, 불신 세상이 교회를 박해하지만, 하나님은 교회(성도)를 보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환난은 기한이 있습니다.

42개월(3년 반)이면 끝난다고 합니다(11:2).

물론, 이것 문자적인 3년 반이 아닙니다.

엘리야 때에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비가 오지 않은 기간이 3년 반이었습니다.

다니엘서에서 “한 때, 두 때, 반 때” 즉 세 때 반도 악이 맘껏 활동하도록 허락된 환난의 기간이었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11장의 3년 반도 교회가 박해받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박해에 쉬운 박해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박해는 다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기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환난은 그 기간이 지나면 끝이 납니다.


환난과 핍박을 저에게 적용해 봅니다.

지금 미국에서 물리적인 박해를 받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적당히 신앙 생활하면, 소위 나일론 신자로 살면,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제대로 믿으려고 하면, 그때부터 어려움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성도가 신실하게 살려고 할 때, 고난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딤후 1:8).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2).

바울의 권유처럼, 저도 세상에 맞서고, 고난과 핍박에 대항하는 삶을 살려고 해봐야겠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identity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환난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가 측량하신 땅을 절대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악한 세력이 성도의 육체를 괴롭힐 수도 있고,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결코 승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영혼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자는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믿음이 승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저도 매일 크고 작은 영적 싸움을 싸우며 삽니다.

가끔은 상처를 입고 신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새 힘을 얻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하나님이 절대 저를 포기치 않으실 것을 믿습니다. 

반드시 저를 지키고 보호해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2. 두 증인

“(계 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 두 증인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두 증인을 세우시고, 이들에게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리니”는 단순한 미래시제가 아니라,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증인들은 굵은 베옷을 입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죄에 대한 슬픔과 회개를 표현할 때 베옷을 입었습니다.

예를 들어, 니느웨 왕이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할 때, 왕복을 벗고 베옷을 입었습니다(욘 3:6).

저는 얼마나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는지 돌아봅니다.

위로도 중요하지만, 회개는 더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증인들이 활동하는 기간도 1260일, 즉 3년 반입니다.

이 기간은 2절에서 이방인이 거룩한 성을 짓밟도록 허용한 42개월(3년 반)과 같은 기간입니다.

어려운 시간, 환난의 시간에도 하나님은 일꾼들을 보내셔서 복음 증거의 사역을 계속하게 하십니다.

한편에선 환난과 핍박으로 악한 세력이 흥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른 편에선 하나님의 사역이 계속 진행되는 것입니다.

마치 겨울에 강의 표면은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으로는 강물이 흘러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최근에 코로나와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교회들마다 사역이 약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이 물밑에서 역사해 주실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도 역사해 주시길 간절히 사모하게 됩니다.


이 기간은 사탄이 득세하는 힘든 기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기간에도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셔서 사역을 감당케 하십니다.

그리고 필요한 힘과 능력도 주십니다.

이 두 증인은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입니다(11:4).


a. 이것은 스가랴 환상을 생각나게 합니다(슥 4장).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해서 성전을 지을 때,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지도자였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두 감람나무에서 기름을 공급받는 순금 등잔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두 감람나무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이고, 감람나무가 공급하는 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성령님을 의지하면, 성령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성전 재건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환상이었습니다. 

“(슥 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두 인간 지도자가 있지만,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셨습니다.


b. 요한계시록 1장에서 교회를 촛대에 비유했습니다(계 1:12-13).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했습니다(계 1:20).

교회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곳입니다(마 5:14). 

또한, 주님이 세상의 빛이심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합니다(요 8:12).

물론, 우리 교회도 이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나,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교회란 것입니다. 

나도 빛을 드러내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두 촛대는 주 앞에 서 있습니다.

“주 앞에”는 하나님 앞에서, 즉 코람데오(Coram Deo)를 생각나게 합니다.

비록 두 증인은 땅에 있지만, 그리고 박해와 환난도 겪어야 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하나님의 천상의 궁정 안에 있습니다. 

저도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주님의 주권적인 임재를 체험하며 살려고 애써야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저를 끊어낼 수 없을 줄 믿습니다(롬 8:39).


주님, 

오늘도 주님 앞에서, 주님 품 안에서 살기를 소망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EDdnDS1s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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